『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금강산유점사사적기(金剛山楡岾寺事蹟記)』에 따르면, 유점사는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건·확장되어 금강산 4대 사찰 중 가장 큰 절로 유명하였다. 종명(鐘銘)에 의하면, 유점사종은 성화(成化) 5년 3월, 즉 1469년(예종 1)에 처음 제작되었으며, 지금의 종은 1729년에 원래 것보다 크게 고쳐 만든 것이다. 유점사종은 유점사의 동종(銅鐘)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유점사가 파괴되면서 땅속에 묻혀 있었다가, 전후(戰後)에 발굴되어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졌다.
유점사종은 낙산사종, 봉선사종 등 1469년에 제작된 조선 전기의 범종들과 비교할 때 양식적 유사성이 다소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점사종이 조선 후기에 다시 제작될 때 초본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유점사종은 종신의 우아한 곡선미와 복련 견대(肩帶), 보상화 문양대, 유곽 사이의 보살입상 등의 조각술이 돋보이는 범종으로서 조선 전후기 범종의 특징이 혼재되어 있다.
유점사종은 현재 묘향산 보현사 종각에 보존되어 있다. 유점사종의 높이는 2.1m(종신 1.6m, 용뉴 50㎝), 무게는 7.2t이다. 종의 고리부분에는 힘차게 몸통을 치솟고 있는 쌍룡의 용뉴(龍鈕)가 있다. 용머리는 천판에서 분리되어 있으며, 용통(甬筒)은 없고 직경 6∼7㎝ 정도의 원공(圓孔)만 뚫려있다. 종견(鐘肩)부분에는 복련 29개를 새긴 견대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범자(梵字) 28자를 새겨 둘렀다.
종신(鐘身)은 세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종신의 윗부분에는 한 변이 30㎝ 정도인 사각형의 유곽 4개를 두고, 유곽 1개당 연꽃잎모양의 유두(乳頭)를 9개씩 돋을새김하였다. 유곽 사이사이에는 1구씩의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종신의 윗부분과 가운뎃부분에는 세 줄의 가로띠가 둘러져 있으며, 그 아래에 종의 내력과 유래, 종 제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 종신의 가운뎃부분과 아랫부분에는 가로띠가 있으며, 그 밑에 보상화 문양대가 돌려져있다.
유점사종은 조선 전후기 범종의 형태 및 구조, 뛰어난 조각술, 금속주조솔 등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북한의 국보급 제162호로 보존·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