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수록된 글씨는 세 가지인데, 북송 말~남송 초의 유학자 범준(范浚)의 「범씨심잠(范氏心箴)」을 쓴 해서, 당나라 두보(杜甫)의 칠언장시 「애강두(哀江頭)」를 쓴 행서, 그리고 두보의 칠언율시 3수를 작은 행초로 쓴 것이다. 말미에 그의 나이 58세인 “1647년(인조 25) 시월에 설정옹이 심수재를 위해 도성 서쪽 초옥에서 쓰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조문수는 1645년 9월에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가 1647년 4월 이후에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1647년 10월 22일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 그해 12월 30일에 원주에서 사망하였다. 따라서 이 글씨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기 직전의 필적이다.
조문수의 증손 조하망(曺夏望)이 지은 행장을 보면,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본래 송설(松雪: 조맹부)을 좋아했으나 그 자태가 무미(嫵媚: 교태롭고 아리따움)한 것을 싫어하여 단지 뼈마디와 살집이 전하는 점만을 취하고 왕희지의 맑고 순진한 필의를 섞으니, 체격과 기운이 무르익고 순수하며 파임과 지게머리가 물 흐르는 듯하였다. 글씨 쓸 적에는 마치 바람과 비가 몰아치듯 크고 작은 해서와 초서가 각기 그 극진한 경지를 이루었다. 동시대의 남창(南窓: 김현성), 동회(東淮: 신익성), 분서(汾西: 박미) 같은 분들이 모두 송설을 순수하게 배웠는데, 그래서 서로 그를 위해 양보하며 ‘설정옹이 왕희지와 조맹부 사이를 절충한 것은 우리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찬미하였다.” 한다.
『위심수재서(爲沈秀才書)』는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즉 「범씨심잠」은 단정한 짜임과 명료한 획법에서 왕희지를 따른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천자문』에 가깝고, 「애강두」 행서와 「두시칠율3수(杜詩七律三首)」 행초는 조맹부 글씨의 뼈대와 살집을 사용하되 교태로운 필의를 걷어내어 맑고 간명한 필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인조실록』에 실린 조문수의 졸기(卒記)에서 “사람됨이 겸손하고 화평하며 평온하고 조용했다”는 평에 수긍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