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말미에 “병술초추(丙戌初秋) 창옹재벽성견한(滄翁在碧城遣閑)”이라 하여 52세이던 1646년(인조 24) 7월에 벽성에서 한가한 틈을 내어 썼음을 밝혔다. 벽성은 전북특별자치도 김제(金堤)의 옛 이름으로 당시 조속은 김제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다(재임 기간: 1645년 4월 22일~1649년 3월 28일). 수록된 당송시는 모두 17수로 당 두보(杜甫)의 시가 오언율시 11수, 칠언율시 1수로 가장 많고, 뒤쪽에 원진(元稹)의 칠언절구 1수, 이백(李白)의 오언율시와 칠언고시 각 1수, 북송 주돈이(周惇頤)의 오언율시 1수 및 두보의 칠언율시 1수의 순으로 실려 있다.
조속은 인조~현종 때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했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관직은 주로 지방관을 지냈는데, 1627년 덕산현감, 1642년 서산군수, 1645년 김제군수, 1650년 대구부사, 1652년 천안군수에 임명되었고, 그 사이에 공조정랑, 장령, 진선 등을 지냈다. 풍채가 맑고 깨끗했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청빈했으며, 고금의 서화와 금석탑본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다. 글씨는 간정(簡淨)한 필획의 행초를 즐겨 구사했으며, 서풍은 원나라 선우추(鮮于樞, 1235?~1307 이전)와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선우추는 조맹부와 함께 원대 서예의 중심인물로 특히 초서를 잘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그의 필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수집품에도 초서 6점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반기 내내 선우추의 서풍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예는 드물며, 그런 점에서 조속의 글씨는 17세기 서예사에서 특기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