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속 초서 창강필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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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속 초서 창강필적
조속 초서 창강필적
서예
작품
국가유산
조선 중기의 문인서화가 창강(滄江) 조속(趙涑)이 1646년에 대중소의 초서로 당송시를 쓴 서책.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조속 초서 창강필적(趙涑 草書 蒼江筆蹟)
분류
기록유산/서간류/서예/서예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2010년 10월 2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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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의 문인서화가 창강(滄江) 조속(趙涑)이 1646년에 대중소의 초서로 당송시를 쓴 서책.
내용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말미에 “병술초추(丙戌初秋) 창옹재벽성견한(滄翁在碧城遣閑)”이라 하여 52세이던 1646년(인조 24) 7월에 벽성에서 한가한 틈을 내어 썼음을 밝혔다. 벽성은 전북특별자치도 김제(金堤)의 옛 이름으로 당시 조속은 김제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다(재임 기간: 1645년 4월 22일~1649년 3월 28일). 수록된 당송시는 모두 17수로 당 두보(杜甫)의 시가 오언율시 11수, 칠언율시 1수로 가장 많고, 뒤쪽에 원진(元稹)의 칠언절구 1수, 이백(李白)의 오언율시와 칠언고시 각 1수, 북송 주돈이(周惇頤)의 오언율시 1수 및 두보의 칠언율시 1수의 순으로 실려 있다.

조속은 인조~현종 때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했으나 훈명(勳名)을 사양하였다고 한다. 관직은 주로 지방관을 지냈는데, 1627년 덕산현감, 1642년 서산군수, 1645년 김제군수, 1650년 대구부사, 1652년 천안군수에 임명되었고, 그 사이에 공조정랑, 장령, 진선 등을 지냈다. 풍채가 맑고 깨끗했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청빈했으며, 고금의 서화와 금석탑본을 수집 완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시서화에 두루 뛰어났다. 글씨는 간정(簡淨)한 필획의 행초를 즐겨 구사했으며, 서풍은 원나라 선우추(鮮于樞, 1235?~1307 이전)와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선우추는 조맹부와 함께 원대 서예의 중심인물로 특히 초서를 잘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그의 필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수집품에도 초서 6점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반기 내내 선우추의 서풍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예는 드물며, 그런 점에서 조속의 글씨는 17세기 서예사에서 특기할 만하다.

참고문헌

『우리나라의 옛글씨』조선후기 명필(문화재청,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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