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삼양동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대규모 마을 유적.
유적
건립 시기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면적
18,363㎡
소재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99년 11월 16일 지정)
소재지
제주 제주시 선사로2길 13, 외 (삼양일동)
내용 요약

제주 삼양동 유적(濟州 三陽洞 遺蹟)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대규모 마을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나온 금속제 무기류를 비롯하여 유리 장신구 등 중국이나 한반도산 물품으로 볼 때, 마을의 상위계층은 제주도 밖 정치체들과의 교역을 주도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은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무대에 등장한 해안가의 거점 유적이며,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재된 주호국과그 이후 탐라국 형성기의 문화로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대규모 마을 유적.
위치 및 입지

제주 삼양동 유적은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제주도 최대 규모의 마을 유적으로 북쪽 해안가에 자리한다. 유적은 제주시청에서 동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으며, 해발 12∽40m 정도의 해안단구상의 편평한 대지에 형성되어 있다.

삼양동 일대에는 주1가 풍부하며 동쪽의 음나물내와 서쪽의 산수천 등 두 개의 하천이 있어서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이다. 두 하천 사이에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마을이 분포하는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발굴경위 및 결과

제주 삼양동 유적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동 일대의 토지구획 정리사업과 관련하여 1997년에서 1999년에 걸쳐서 제주대학교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원형 평면의 송국리형 집터를 위주로 하는 대형 및 소형 집터 236기를 비롯하여 창고, 토기 제작지, 조리 장소, 주2, 마을 경계 시설, 배수 시설, 쓰레기장, 고인돌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주3 조각과 철슴베가 있는 청동화살촉, 칼자루 끝장식, 유리 장신구인 옥고리, 유리구슬 등 중국 및 한반도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계(外來系) 유물들이 불에 탄 곡식(쌀 · 보리 · 콩 등)과 함께 나왔다. 이는 당시의 삼양동 마을 사람들이 대외 교역을 통해 재화를 축적하면서 제주도 최대의 중심 마을로 성장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삼양동 유적은 이와 같은 학술적 의미와 문화재의 보존 가치를 인정 받아 1999년 11월 16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전시관과 유적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의 쉼터이자 역사 교육 및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2000년대에도 삼양동 일대는 삼화지구 내 택지개발 사업지구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개발에 수반한 발굴 조사를 통해 많은 수의 원형 송국리형 집터 또는 장방형의 집터와 지상 건물, 소성유구(화기를 사용한 흔적), 주4, 주5, 주6, 주7, 구덩이, 도랑 등이 확인되면서, 삼양동 마을 유적의 규모가 사적지 지정 범위 밖으로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삼양동 유적의 북쪽에 해당하는 사적지 일대는 집터 등 생활공간이 중심을 이루고, 남쪽에 해당하는 삼화지구 일대는 무덤의 분포 밀도가 높다. 송국리형 집터와 주8, 삼양동식 토기가 존속하는 시기에는 마을의 구성에서 삶의 영역인 생활 공간과 죽음의 영역인 무덤 공간이 나뉘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와 특징

제주 삼양동 마을 유적이 존속한 시기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전 10세기부터 초기 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 속하는 2세기대까지이다. 주9로 보면 대략 1,200여 년간 다양한 문화변동 과정을 거치면서 장구한 역사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 유적의 이른 시기에는 주로 장방형 집터에서 구멍무늬, 골아가리무늬, 골아가리구멍무늬가 있는 주10가 출토되었으며, 구덩이에서 겹구연짧은빗금무늬토기와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 골아가리토기, 붉은간토기, 간돌검, 돌끌 등이 나왔다. 제주도의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을 대표하는 남제주상모리패총과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이어지는 시기에는 송국리형 원형 집터를 비롯하여 삼양동식 토기와 덧띠토기가 유행하는데, 삼양동 유적에서 그 규모와 위상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송국리형 집터는 남한 지역 청동기시대 중기 문화를 대표하는 주거 형태이며, 덧띠토기는 후기 문화를 대표하는 토기 형식이다. 삼양동 유적에서 송국리형 집터가 덧띠토기보다 먼저 등장한 것은 분명하지만, 두 문화 요소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공존하였다.

제주 삼양동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이름이 붙여진 삼양동식 토기는 아가리가 직립하거나 약하게 밖으로 벌어져 짧은 편인 깊은바리형 및 독모양의 주11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독모양토기는 최대경이 몸통 부분의 중앙과 상단에 위치하는 형식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토기 바닥의 직경과 아가리 직경의 비례가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깊은바리형은 밑바닥이 비교적 좁고 아가리가 넓은 형식으로 민무늬토기 중기 이후의 기형과 유사하다. 대체로 광주신창동유적이나 해남군곡리패총, 삼천포늑도패총에서 종말기 단계에 속하는 민무늬토기 변화형으로 나타난다.

삼양동식 토기는 남한 지역 송국리식 토기 또는 덧띠토기 시기 민무늬토기의 변형이며, 제주도에 토착화된 곽지리식 토기보다 앞서 유행한 형식이다. 덧띠토기는 원형 덧띠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삼각형 덧띠토기는 소수이다. 손잡이달린토기, 검은간토기와 민무늬 굽다리접시도 나오지만 양은 적은 편이다.

이와 함께 간돌검, 칼자루 끝장식, 간돌화살촉, 돌도끼, 주12, 돌끌, 공이, 홈돌, 갈돌, 갈판, 가락바퀴, 그물추, 숫돌 등이 나왔다. 희소한 가치를 가진 고가의 위세품(威勢品)으로 금속 유물인 비파형동검 조각과 청동화살촉이 나왔으며, 옥고리와 유리구슬 등 장신구가 있다. 한편 제주삼양동유적이 쇠퇴하면서 소멸하는 마지막 시기는 곽지리식 토기와 주12가 나오는 2세기이다.

의의 및 평가

제주 삼양동 유적은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의 제주도 최대 규모의 마을 유적이다. 삼양동 마을의 사회 성격은 집터의 규모와 무덤,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계층화가 상당히 진행된 집단 공동체로 추정된다.

제주 삼양동 유적의 고고학적 문화는 송국리형 집터를 비롯하여 덧띠토기 등의 양상으로 보면, 한반도 남부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호남 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청동검이나 청동화살촉 등과 같은 금속제 무기류를 비롯하여 옥고리와 유리그릇 등 중국이나 한반도산으로 추정되는 물품의 존재로 볼 때, 마을의 상위계층은 제주도 밖 정치체들과의 교역을 주도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해남군곡리패총을 비롯하여 삼천포늑도패총 등 한반도 남해안의 유적들과 일본 이끼섬의 하루노츠지〔原ノ辻〕 유적 등 국제 교역의 거점 유적과도 연결되는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제주 삼양동 유적은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무대에 등장한 제주도의 대규모 마을 유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재된 주호국(洲胡國)과 그 이후 탐라국의 형성기 문화로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고고학적 의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단행본

『제주 삼양동 1498-2번지 유적)』(제주고고학연구소, 2020)
『제주 삼양동 1659-7번지 유적)』(제주고고학연구소, 2020)
『제주 삼양동유적(1412번지)』(제주문화유산연구원, 2015)
『제주 삼양동유적(2139-5번지)』(제주문화유산연구원, 2015)
『제주 삼양동유적-제주시 삼양1동 1239번지 공동주택 신축부지내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보고서』(제주문화유산연구원, 2015)
『제주 삼양동유적-Ⅵ지구(1665-1번지)』(제주문화유산연구원, 2011)
이형원, 박영구, 김경주, 『송국리형주거지 집성Ⅰ-경기도 · 강원도 · 제주도』(서경문화사, 2010)
『제주 삼양1동 1249-7번지 유적』(제주문화유산연구원, 2010)
『濟州 三陽洞遺蹟-Ⅰ · Ⅴ地區』(제주대학교박물관, 2002)
『濟州 三和 나地域 遺蹟-Ⅰ · Ⅱ구역』 (호남문화재연구원, 2010)
『濟州 三和 나地域 遺蹟-Ⅲ구역』(호남문화재연구원, 2010)
『제주세무서 직원사택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국립제주박물관, 2007)
『제주시 삼양2동 2132-1번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국립제주박물관, 2007)
『濟州 三陽洞遺蹟-Ⅰ · Ⅴ地區』(제주대학교박물관, 2002)
『濟州의 歷史와 文化』(국립제주박물관, 2001)
『濟州 三陽洞遺蹟-Ⅱ · Ⅲ地區』(제주대학교박물관, 2001)

논문

김경주, 「제주지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정착과 변천과정」(『한국청동기학보』 22, 한국청동기학회, 2018)
오원홍, 「탐라 이전 송국리형 주거취락의 변화 양상: 삼양동 · 용담동 일대 유적을 중심으로」(『호남고고학보』 58, 호남고고학회, 2018)
박경민, 「제주 북서부 청동기시대 물질문화의 시간적 흐름과 성격-주거지와 토기를 중심으로-」(『호남고고학보』 56, 호남고고학회, 2017)
이종철, 「제주도 송국리형취락의 특징과 시기 구분」(『한국청동기학보』 21, 한국청동기학회, 2017)
김경주, 「제주지역 송국리문화의 수용과 전개」(『한국청동기학보』 6, 한국청동기학회, 2010)
김경주, 「탐라형성기 취락의 형성과 변천」(『호남고고학보』 22, 호남고고학회, 2005)
주석
주1

땅 밑에서 지표면으로 솟아 나오는 물. 지하수가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뚫고 나온다.    우리말샘

주2

선사 시대의 집터에서 난방과 음식 마련을 위하여 불을 피우던 자리. 가장자리의 바닥에 흙 또는 돌을 두르거나 깔았다.    우리말샘

주3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비파 모양의 동검. 중국 랴오닝성ㆍ만주ㆍ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우리말샘

주4

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는 무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인 무덤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쓰여 지금까지도 일부 섬 지방에서 쓰이는데, 하나의 토기만을 이용하기도 하고 두 개 또는 세 개를 이용하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5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목관이나 목곽에 시체를 넣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무덤.    우리말샘

주6

깬돌이나 판돌을 잇대어 널을 만들어서 쓴 무덤. 주로 청동기 시대에 썼다.    우리말샘

주7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石材)로 덧널을 만든 무덤. 삼국 시대에 사용했으며 널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샘

주8

아가리의 단면에 원형, 타원형, 삼각형의 띠를 말아 붙인 민무늬 토기. 청동기 시대 후기에 만들어졌다.    우리말샘

주9

방사성 원소와 그것들의 붕괴 생성물을 양적으로 측정한 광물이나 암석 따위의 연대.    우리말샘

주10

그릇 몸통의 지름보다 속이 깊은 바리.    우리말샘

주11

청동기 시대에 사용한 무늬 없는 토기. 지역에 따라 팽이형 토기, 미송리식 토기, 화분형 토기 따위가 있으며 빛깔은 붉은 갈색이다.    우리말샘

주12

머리 부분에 홈이 팬 자귀 모양의 석기. 이 홈에 직각으로 된 나무 자루를 대어 묶어서 썼다.    우리말샘

주13

실내 가마에서 민무늬 토기보다 약간 높은 900℃ 정도의 고온으로 구워 기와처럼 회색을 띠는 약간 무른 토기.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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