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동 제단 ( )

고대사
유적
북한 평양직할시 룡성구역 당모루마을에 있는 고대 단군 관련 제단. 북한문화재.
이칭
이칭
화성동 유적
정의
북한 평양직할시 룡성구역 당모루마을에 있는 고대 단군 관련 제단. 북한문화재.
개설

북한 국보유적 제188호. 북한 학계에서 단군조선 초기에 단군을 제사하던 제단으로 주장하고 있는 2기의 석구조물 유적이다. 1996년 11월부터 1997년 5월까지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평양직할시 용성구역(龍城區域) 화성동(和盛洞) 당모루 부락에서 2기의 석구조물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당모루 마을 동쪽 지표고 20m의 낮은 등성이에 있는 것이 1호이고, 마을 남쪽으로 800m 정도 현재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 들판의 경작지에 있는 것이 2호이다. 2기의 석축 시설 앞에 길이와 너비 약 40~45m 가량의 진흙을 평탄하게 깔아 마련한 넓은 평탄 대지가 있다.

내용

1호 유적은 당모루 마을 뒷산에서 마을 동쪽으로 뻗어내린 작은 줄기 끝의 지표고 20m 가량의 둔덕 정상부 평탄처에 조성되어 있다. 둔덕의 정상부는 평탄화 작업을 거친 후 그 위에 동서 길이 30m, 남북 길이 35m 범위로 진흙을 1.5m 가량 다져 인위적인 대지를 마련하여 놓았다. 1호 유적은 이 평탄면 중심부 약간 뒤쪽에 조성되어 있는데, 길이 2~3m, 너비 1~2m, 두께 1~1.5m 가량의 화강암을 바깥면이 배부른 장방형을 이루도록 다듬은 후 이들 석재를 남북 길이 18m, 동서 길이 20m 규모의 평면 원방형 시설의 외곽을 이루도록 한 단을 쌓고, 내부에 작은 강돌과 깬돌을 채워 놓았다. 1호 유구의 남벽 중앙부에는 길이 1.4m, 너비 0.55m, 두께 0.4m 크기의 사각추 꼴의 기다란 화강암 2매를 포개어 놓아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중앙부 계단의 좌우측 1m 지점에도 그와 같은 시설로 여겨지는 각 1매의 화강암이 있었고, 유구의 동남쪽과 서남쪽 모서리에도 같은 크기의 화강암석이 각 1매씩 있었다고 한다.

2호 유적은 전체 규모가 동서 길이 17m, 남북 길이 14.5m인데, 1호 유적과는 달리 석구조물이 다소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즉, 1호 유적에 쓰인 것과 같은 형태로 화강암을 길이 1m, 너비 0.8~0.9m, 두께 0.6~0.7m 크기로 가공한 뒤 이 석재를 사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되, 안측에 1호와 같은 구조의 원방형 시설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 안측의 구조물 전체를 돌아가며 폭 2~2.5m의 범위에 걸쳐 깬돌을 한 두 벌 깔아 놓아 마치 회랑과 유사한 공간을 마련한 뒤, 그 바깥쪽에 4~4.5m 간격을 두고 큰 돌을 깔아 외곽의 건축물 선을 최종 마무리한 형태이다. 1호 유구와 마찬가지로 남쪽이 정면을 이루고 있고, 정면부에 강돌을 일정한 폭과 길이로 깔아 놓은 시설이 부가되어 있다. 2호 유구는 1호 유구와는 달리 잔존 상태가 좋지 않은 듯, 1호처럼 상세한 구조가 보고되어 있지 않다.

두 유적의 석축 구조물 내부와 주변에서 대동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유물들인 팽이형토기편과 두나래뿌리활촉 등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북한 학계에서는 단군릉 발굴 이후 새로이 구성한 편년 체계에 따라 화성동 유적을 토기편과 화살촉을 근거로 기원전 3천년 전반기로 편년하였다. 그리고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 『단기고사(檀奇古史)』에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참성단(塹星壇)이 고조선 시대 단군에 대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되어 있고 화성동 유적의 유구 현황이 참성단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들어 제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해석과 편년관을 토대로 화성동 유적이 단군조선 초기에 단군조선을 개국한 단군을 국가적으로 제사지내던 유적이라고 해석하였다.

특징

화성동 유적은 상부에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석축 시설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언뜻 제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성동 유적은 길이 2~3m에 너비 1~2m 크기의 화강암을 밖으로 나오는 면이 불룩하게 다듬어 테두리돌로 사용하였다는 점과 과거 화성동의 유사한 입지에서 고구려 횡혈식석실분(벽화분)이 조사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기원전 3000천년 전반기가 아닌 고구려시대의 유적으로 판단된다. 유구와 주변에서 수습되었다고 하는 팽이형토기편 등은 고구려 때 이 지점에 유적을 만들면서 같은 자리에 조성된 앞선 시대의 유물이 얼마든지 섞여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유적을 북한의 편년 체계에 따라 편년한 기원전 3000년은 그만두고라도 청동기시대로 편년할 절대적인 근거는 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화성동 유적은 북한이 단군릉을 발굴한 이후 단군조선 시기의 제단이라고 보고한 몇 개의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에서 단군조선 시기의 제단으로 보고한 유적으로는 평양직할시 순안구역(順安區域) 오산리(梧山里) 유적과 황해북도 연탄군(燕灘郡) 오덕리(五德里) 유적 등이 있다. 그러나 유적 보고 정황을 고려할 때, 이들 유적을 단군조선 때의 제단으로 인정할만한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북한이 이들 유적을 단군조선의 제단으로 보고하면서 일제강점기 대종교 계열 인사들이 저술한 민족주의 관련 저서들을 다수 인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 단군릉 발굴 이후 고조선에 관한 북한의 인식 전환과 연구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새로 발견된 룡성구역 화성동 고대제단유적」(류충성, 『조선고고연구』109, 평양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98)
「최근 제기된 북한학계의 고조선=평양설에 관하여 : 북한의 단군릉 발굴과 그에 관한 남북한학계의 논고를 중심으로」(오강원, 『백산학보』46, 백산학회, 1996)
집필자
오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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