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군에서 태어났고, 1947년 무렵 개최된 가수선발대회에서 당선되어 가수로 데뷔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인기 가수로 활동하며 많은 히트곡 음반을 발표했고, 이후 신곡 발표는 많지 않았으나 원로 가수로서 무대 활동을 했다.
출생지는 경기도 시흥군이지만 어린 시절 함경남도 함흥시로 이주해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가수로 데뷔하기 이전 광복 전후에는 전기기술자로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7년 무렵 가수선발대회 당선을 계기로 데뷔해 많은 인기곡을 발표했고, 한국전쟁 동안과 그 직후 1950년대 중반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신곡 발표 중단 이후에도 공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활동을 꾸준히 이어 갔으나, 말년에 지병이 악화되어 타계했다.
데뷔곡은 1948년 오케레코드에서 옥두옥과 함께 듀엣으로 발표한 「눈물의 오리정」이며, 이후 서울레코드ㆍ고려레코드ㆍ도미도레코드ㆍ미도파레코드ㆍ신세기레코드 등에서 전속가수로 활동하며 많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마음의 사랑」(1949년), 「울고 넘는 박달재」(1950년), 「물방아 도는 내력」(1953년), 「경상도 아가씨」(1955년), 「휘파람 불며」(1957년), 「유정천리」(1959년) 등을 들 수 있다. 당초 영화 주제가로 발표되었던 「유정천리」는 1960년 대통령선거 야당 후보였던 조병옥의 갑작스런 타계와 관련해 대중의 자발적인 추모 개사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40년대 인기 가수였던 백년설의 뒤를 이어 구수함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서민적 대중가요로 인기를 모았고, 담백하면서도 힘 있는 창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박재홍이 부른 대표곡 「울고넘는 박달재 노래비」는 1988년 제천군 백운면과, 2001년 박재홍의 고향인 서울 금천구 금천체육공원에 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