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물론 기타 전공 과목을 한국어로 가르칠 수 있는 교원을 양성하려고 설립하였다. 자연히 교원과 학생들은 러시아어 외에 한국어 학습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17년 3월에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난 뒤 내전이 끝나자, 소련 정부는 국가 전반에 걸쳐서 개혁을 실시하였다. 당시 개혁의 기조는 토착 민족의 가치가 존중되는 토착화 정책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극동 지역에 거주하였던 조선인, 곧 고려인들은 1924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Nikolsk-Ussuriysk) 사범대학에 개설되었던 조선어과의 수준을 뛰어넘는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1927년 5월에 기금을 모아 보다 민족적 성향을 강하게 담았던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조선인 사범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는 극동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고려인 사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기능하였다.
1935년에 행정구역 변경으로 니콜스크-우수리스크는 보로실로프(Voroshilov)로 바뀌어 불렸다. 이에 따라 학교 이름도 보로실로프 조선인 사범학교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1937년에 소련 정부가 극동 지역의 고려인에 대한 강제이주를 결정하여 집행하면서, 보로실로프 조선인 사범학교도 카자흐공화국의 카잘린스크(kazalinsk)로 옮겨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장 도서가 많이 없어졌다. 일부는 불태워졌지만, 일부는 시민에 의해 알마티(Almaty)도서관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이외에 다른 지방의 대학 도서관에 보내진 도서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잘린스크에서 다시 문을 연 사범학교는 카잘린스크 전문학교 건물에서 수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수업의 효율성이 매우 낮았으므로, 1938년 6월에 소련 정부가 폐교를 결정하였다. 당시 사범학교를 다녔던 고려인 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 조치되기도 하였지만, 곧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경우도 많았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조선인 사범학교는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전반에 소련 극동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의 교육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30년과 1931년에 연해주의 포시예트(Posyet)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조선인 사범학교가 설립되는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소련 정부의 민족교육기관 억압 정책으로 폐교되면서,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민족 교육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