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는 새로운 이주자가 계속 들어왔다. 곧 1860년대에 조선의 함경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들어갔는데, 그 인원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였다. 러시아 영토 안에 거주하였던 모든 이주 고려인들은 1884년에 조선과 러시아가 국교(國交)를 수립하자, 러시아 국적을 자동적으로 얻어 러시아 사람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에는 유럽에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러시아 사람은 물론 우크라이나 지역의 사람들도 이주하여, 고려인들은 이들과 함께 공동으로 삶의 터전을 개발해 나갔다.
러시아 당국은 조선에서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들어오자, 이전과 달리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서 입국자를 제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조선 이주민의 러시아 국적 취득 과정을 까다롭게 시행하여 극동 지역의 한인 가운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매우 힘들어졌다. 곧 국적을 받으려면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당국에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여야 했고, 종교도 러시아정교로 바꾸어야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러시아로 넘어가서 살게 되었던 조선 이주민이 수용하기에 매우 힘든 것이었다. 자연히 러시아 국적이 없이 거주하는 조선 이주민이 증가하였다.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인은 러시아 국적을 갖춘 원호(元戶)와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여호로 구분되었다. 특히 시간이 흐를수록 원호보다 여호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극동의 연해주 지역만 살피면, 1906년에 원호는 16,965명, 여호는 18,014명이었고, 1910년에는 원호가 17,080명, 여호가 36,885명이었다. 여호는 원호에 비해 불안정한 거주 상황에 놓여 자녀 교육에도 지장을 받았다.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뒤에도 극동 지역의 이주 한인들은 꾸준히 증가하였지만, 대체로 원호보다는 여호가 더 많았다.
여호는 원호와 함께 러시아 극동 지역 한인 공동체의 핵심을 이루었는데,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대부분 소비에트(Soviet) 진영에서 활동하였다. 기존의 국가 질서를 없애고 새로운 이상의 실현을 내세운 소련에서는 여호와 원호의 구분이 당연히 사라지고, 한인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