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전국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집단농장으로, 김병화의 뛰어난 지도력이 크게 알려졌다. 언론에서는 ‘극성 콜호즈(kolkhoz)’라고 표기하기도 하였지만, 김병화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병화 콜호즈’라고 불렸다.
1928년에 스탈린은 농촌 사회를 사회주의적 이상에 맞게 공동체화하려고 농업집산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농지의 사유화를 불법으로 여기고,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를 실현할 수 있는 집단적 농업개혁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서 전국의 농토는국영농장인 솝호즈와 집단농장인 콜호즈 체제로 다시 조직되었다. 이 때 극동 지역에서는 북극성 콜호즈가 설립되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1929년 12월에 지금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미하일로브카군(郡) 리포프카 농촌 마을에 설립되었다. 당시 약 20명의 농민들이 500여 ha의 농지를 터전으로 콜호즈를 꾸렸는데, 점차 50여 가구로 구성원이 확대되었고, 1931년에는 같은 군에 있는 랄리츠 농촌 지역으로도 확대되었다. 그 뒤 1937년에는 지금의 타슈켄트 지역인 우즈베크공화국의 중치르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768ha 규모의 토지에 주로 벼를 심는 농장으로 재편되었다. 이 때북극성 콜호즈는 123가구, 29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도 사육하였다. 하지만 강수량이 적었기에, 벼농사는 점차 어려워졌다.
북극성 콜호즈는 김병화를 새로운 지도자로 영입하면서 그동안의 어려움을 털어내고 크게 발전하였다. 김병화는 소련군 하급장교 출신이었는데, ‘노브이 푸치(새 길)’라고 불리던 콜호즈에서 북극성 콜호즈의 회장으로 부임하여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1941년에 면화를 시험 재배한 뒤, 초창기 작물이었던 벼와 함께 면화를 재배하였다. 벼는 물론 면화의 생산량이 꾸준히 증가하였고, 우수한 경영 지도 방법으로 인해 김병화는 1949년과 1951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또한 김병화를 도운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들도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리 니콜라이, 김 니콜라이, 허 세르게이 등인데, 대부분 벼농사와 면화재배 전문가였다. 특히 김창세는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김 니콜라이는 벼나 면화 재배 외에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하였다. 아울러 김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었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통합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Akhunbabayev)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안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1974년에 김병화가 세상을 떠나자, 북극성 콜호즈는 국가적 차원에서 ‘김병화 콜호즈’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 김병화 콜호즈는 1970∼1980년에 우즈베크공화국의 대표적인 농촌 조직으로 유지되었지만,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자, 콜호즈 체제의 붕괴, 이농현상과 공업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그 중요성을 잃어 갔다. 자연히 김병화 콜호즈도 우즈베크 사람들이 만든 조합 형식의 협동 농장으로 바뀌었다. 현재 콜호즈 입구에는 김병화 콜호즈의 표지석과 함께 김병화 개인 박물관이 남아있을 뿐이고, 소수의 고려인들이 마을 공동체에 거주하면서 과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북극성 콜호즈는 고려인들의 근면함과 민족적 우수성을 우즈베크공화국 뿐만 아니라 소련 전체에 널리 알린 대표적인 고려인 콜호즈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