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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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인물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가사」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가곡 · 가사명인.
이칭
이칭
정영옥, 석암(石菴)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6년 2월 7일(호적상 1917년 2월 8일)
사망 연도
2003년 12월 31일
본관
진주(晋州)
출생지
전라북도 부안군
목차
정의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가사」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가곡 · 가사명인.
개설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본관은 진주(晋州), 본명은 정영옥, 호는 석암(石菴)이다. 정종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8세부터 15세까지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9세 때 주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3세 때 졸업을 두 달 남기고 그만두었다. 11세부터 2년간 나이봉 훈장에게 서예와 한문을 배웠고, 13세부터 3년간 향리의 유학자 정도경에게 시문과 사서삼경을 배웠다.

1990년 미국 켄싱턴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2년 일본 동경신학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생애

16세 때 큰 동서인 김한술에게 처음 시조창을 배웠고, 동네 어른 오성현에게 며칠간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배웠다. 그리고 고창에 살던 김춘경에게 시조창을 배웠다.

17세 무렵 고창에 사는 이도삼에게 「사설시조」를 배웠고, 역시 고창에 살던 오윤명에게 「상사별곡」·「처사가」 등의 가사를 배웠다.

19세 때 장성 백양사 절에서 몇 달간 서울 사람 임재희에게 가곡과 가사를 배웠다. 22세 무렵 정읍에 살던 대금의 명인 죽민(竹民) 전계문(全桂文: 1872∼1940)에게 여창 가곡을 배웠다.

24세 때 서울에서 두봉(斗峯) 이병성(李炳星: 1909∼1960)에게 석 달 동안 정가(正歌)를 배웠다. 다시 3년 뒤 이병성에게 72일간 「언락」·「편락」 등 가곡과 가사 전 바탕을 배웠다.

30대 중반에 임석윤에게 거문고로 「영산회상」을, 김용근에게 거문고 가곡 반주를, 부안 사람 김학윤에게 가곡 가야금 반주를 배웠다.

정가 이외에도 어린 시절부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과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에게 필법과 사군자를 배웠다. 전라북도 사람 김소란에게 남무를 배웠고, 대신 여창 가곡을 가르쳤다. 김소란에게 배운 춤은 무보로 정리하여 후에 책으로 출판하였다.

첫 제자는 동네 소년 송창섭이다. 21세에 송창섭에게 여창 가곡을 가르쳐 주었다. 30여 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를 육성하였는데, 송창섭·김소란·박향란·김옥희·조계순에게 여창 가곡을, 유종구·고민순에게 남창 가곡을, 이리 향제줄풍류의 예능보유자 강낙승(姜洛昇: 1916∼2010)에게 12가사와 남창 가곡을, 김경애에게 거문고를 가르쳐 주었다.

해방 이후 그 동안 꾸준히 채보해 온 가락을 정리하여 『조선창악보』(1948)를 편찬하였다.

1952년 전주국악원 창립을 주도하였다. 단소·대금·북 가락과 범패 등의 채보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스스로 노래·거문고·단소 등도 계속 배웠다.

1953∼58년 전주고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특별 활동반으로 국악반을 만들어 교사와 학생들에게 시조창를 보급하였다.

1955년에는 10여 년 동안 채보하고 정리하여 온 『국악보』를 간행하였다. 이 악보에 이리 풍류가락이 남아 있다. 이 악보는 18종의 악기 연주법을 비롯하여 가사·가곡·시조는 물론 판소리·민요·단가·가야금병창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전주고등학교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친 후 풍류객으로서 시조와 가사를 부르며 전국을 다녔다. 이때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시조의 가락을 통일하였다. 즉 경제·내포제·완제·영제·반영제·원제 등의 각기 다른 가락을, 반영제를 바탕으로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였다. 현재 이를 석암제라 부른다.

1961년 대전에서 대한시우회를 결성하였고, 1963년 대한시우회를 창설하였다. 전국에 지부와 지회를 조직하고 전국에 시조·가사·가곡을 보급하여 국민개창운동을 벌이는 한편 매년 전국 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를 열었다.

1967년에 삼화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등 지금까지 여러 종의 정가 음반을 냈다.

1975년 7월 15일 국가무형문화재 가사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같은 해 11월에는 국립극장에서 가사·가곡발표회를 가졌다.

1979년에는 국악계 원로들로 대한정악회를 창설하며 회장직을 맡았다.

1980년 가을부터 1981년 봄까지 한국방송(KBS) 라디오에서 남녀창 가곡 전바탕을 녹음하였다.

정가뿐 아니라 국악·춤·서화·음양학·시문·장기·바둑에도 두루 능하여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국악 공연, 시화·서예전을 열었다. 그리고 『악학궤범』·대금·북·단소·범패 연구와 악보 채보 등의 국악 관련 서적 발간 및 한시집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참고문헌

『한국현대음악인사전』(송방송, 보고사, 2011)
『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 생애(生涯)와 정가(正歌)』(양규태 편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안지부, 2006)
『문예연감』(한국문화예술위원회 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976·1978∼9·1981∼2·1987∼8)
『국악연혁』(국립국악원 편, 국립국악원, 1982)
「명인 명창 박물관(5)」(노재명, 『월간국악』, 2002.6.)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http://www.gugakcd.kr)
한국정악원(http://www.jungga.co.kr)
집필자
최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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