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내취는 조선조 중앙군제가 오위제도에서 오군영 제도로 전환되던 시기에 활동했던 내취이다. 흑내취는 출신지역으로 볼 때 지방 출신이고, 악기편성 면으로 볼 때 취타내취에 속한다. 흑내취는 선전관청 소속이지만, 오위장의 지휘를 받으며 지휘 통신·시위·연주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뒤에 겸내취로 전승되었다.
흑내취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취고수 제도의 성립과 함께 나타난 내취의 한 종류로, 선전관청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오위장의 지휘를 받던 지방출신 군사로 구성된 취타내취이다. 조선후기 취고수는 임진왜란 후 군제의 변화와 함께 새로 등장한 군영악대로, 중앙군영의 경우 훈련도감(訓練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용호영(龍虎營)·장용영(壯勇營) 등 각 군영에 속하여 훈련의 지휘·통신과 입직을 담당하고, 행군·왕의 거둥 연향 등에 참여하여 음악을 연주하던 표하군(標下軍) 소속의 악대이다. 이 취고수의 성립과 함께 취타내취도 성립되었다. 취타내취는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하여 군영의 훈련·왕의 거둥·상참(常參)·조참(朝參) 등의 의례, 진연(進宴)·진찬(進饌) 등의 연향에 참여하여 연주하였다. 흑내취는 악기편성 면에서 취타내취에 속하며, 선전관청 소속임에도 오위장의 지휘를 받았다.
오위장청은 입직(入直)과 행순(行巡)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여 선전관청과 업무의 유사성이 있고, 임진왜란 후에 실권을 훈련도감(訓鍊都監) 등의 새 군영(軍營)에 빼앗기고, 도성(都城)의 숙위(宿衛)만을 맡아보면서 명목만 남아 있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내취는 조선후기에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하여 궁중의 교령·군영의 교련·입직 등에서의 통신 및 동가와 전좌에서의 시위, 왕의 거둥·상참(常參)·조참(朝參) 등의 의례, 진연(進宴)·진찬(進饌) 등의 연향에 참여하여 연주를 담당한 악대이다. 조선후기 내취제도는 기존의 내취라치(內吹螺赤) 제도를 근거로 하여 1672년(숙종 13) 무렵 성립되었다. 조선후기 내취제도의 성립은 조선전기 중앙군제가 오위제에서 오군영제로 바뀌고, 취고수 제도가 도입되는 등 군제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전술 교리를 도입함에 따라 조선의 병제는 속오법(束伍法)에 의해 중앙은 훈련도감을 비롯한 오군영 체제로, 지방은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재편되었고, 16세기말 취고수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취타내취도 성립되었다.
내취의 활동과 관련된 호가(扈駕)와 노부(鹵簿) 의식(儀式)에 관한 정례(定例)는 1727년(영조 3)에 마련되었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1744년(영조 20) 찬정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의 노부와 가례(嘉禮) 배반도(排班圖)의 조하(朝賀)·조참(朝參)·동가(動駕)·진연(進宴)의 전좌(殿座)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내취 제도의 법적 근거는 『대전통편(大典通編)』(1785년, 정조 9)에 나타난다. 내취와 관련된 일은 계라(啓螺) 선전관이 담당하였는데, ‘계라’라는 용어는 『대전통편』에 처음 보인다.
내취제도가 성립된 초기 단계에는 출신 지역에 따라 내취를 구분하여 중앙 출신인 황내취와 지방 출신인 흑내취 제도를 운영하였다. 흑내취는 조선조 중앙군제가 오위제도에서 오군영 제도로 전환되던 시기에 활동했던 취타내취이다. 흑내취는 선전관청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오군영이 성립되기 전에는 오위장에게 이들을 주어 거느리게 하였다. 오군영의 성립 후에는 취타내취는 선전관청에 속하여 활동하고 취고수는 군영에 속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1776년(영조 52) 흑내취를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것에 대한 폐단이 제기되어 이후 번포를 대신 물게 하는 방법으로 유지하였으나, 1790년(정조 14) 군영의 취고수를 각각 한패씩 뽑아 대치하는 겸내취로 전환시켰다.
흑내취라는 명칭은 조선전기 취라치(吹螺赤)가 흑의(黑衣)·흑립(黑笠)을 착용한 전통을 전승한데서 비롯된 듯하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보이는 청내취(靑內吹)는 흑내취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취타내취는 조선전기 내취라치 제도를 계승하였지만, 조선전기 내취라치가 신호통신용 악기 연주자를 지칭하는데 비해 조선후기 취타내취는 악대를 의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악기의 종류도 다양해진 변화가 있다.
겸내취는 구군악대가 해체됨에 따라 장악원으로 이속되었고, 1911년에 장악과가 아악대(雅樂隊)로 개칭됨에 따라 내취도 아악대로 이속되었으며, 1913년에는 취타내취 10명만 남았고, 이후 취타내취 제도는 전승이 단절되었다. 취타내취의 음악은 대취타[武寧之曲] 한 곡이 국립국악원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전기 내취라치(內吹螺赤) 전통을 계승한 조선후기 내취 제도는 기존의 취각의 전통을 계승한 위에 기능을 더욱 확대시켜 활동영역이 넓어졌고, 취타악이라는 새로운 음악장르를 창출했다. 흑내취는 내취의 역사적 변천 과정 중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