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어필 - 제문상정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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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어필-제문상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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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가 1798년에 짓고 쓴 어제어필 칠언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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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가 1798년에 짓고 쓴 어제어필 칠언절구.
내용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조(正祖)가 47세 때인 1798년 9월에 정와(靜窩) 정민시(鄭民始)의 문상정사(汶上精舍)에 대해 짓고 쓴 어제어필 칠언절구이다. 당시 정민시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선혜청 당상·검교 제학·예문관 제학·장용위 제조를 겸직했다. 그는 도성 동쪽 십리쯤 되는 강가 물굽이에 자신의 정사를 마련하였는데, 이곳은 정민시가 말년에 신병을 요양하던 농막으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800년 3월에 사망하였다.

어제시는 『홍재전서』권7 「제문상정사」에 실려 있다. 내용은 “성 동쪽 십리는 배회하기 좋은데[城東十里好盤桓], 그윽한 마을 모습 푸른 나무 물굽이네[窈窕村容碧樹灣]. 알건대 문수는 제나라 노나라 사이이니[汶水知爲齊魯半], 대숲 바람 불게 두고 붙잡을 것 없다네[任他篁韻不須攀].” 이다. ‘문상’이란 중국 산동성 서남부 문상현으로 춘추시대 제(齊) 남쪽과 노(魯) 북쪽 사이를 흐르는 문수(汶水)의 위쪽을 말한다. 옛사람들은 덕행을 중시하여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을 구하고 ‘남이 알아주기(人知)’를 구하지 않았으며, 이를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곤 하였다. 『논어』옹야편(雍也篇)에 나오듯이, 노나라 권신 계씨(季氏: 이강자(季康子))가 공자의 제자로 덕행이 뛰어난 민자건(閔子騫)을 노나라 비(費) 땅의 수령으로 삼으려 하자 민자건은 “나를 위해 제발 사양하겠다. 만일 다시 나를 부르러 온다면 나는 반드시 (노(魯)를 떠나 제(齊) 지역인) 문상에 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아마 정민시도 이러한 옛사람의 뜻을 추종하여 자신의 정사를 ‘문상’이라 이름 한 듯하다.

이 어필은 현존한 정조어필 가운데 가장 크고 글씨도 큼지막하다. 첫줄 제목 위에 12㎝가 넘는 “규장지보(奎章之寶)”를 찍었고 마지막 줄 “무오년 구월(戊午菊秋)” 아래에 “홍재(弘齋)”, “만기지가(萬幾之暇)”란 어용 인장을 찍었다. 바탕은 은은한 분홍색 종이로 구름 속에 승천하는 운룡문(雲龍紋)을 금니로 화려하게 그렸다. 또 상아색 비단과 연회청색 비단으로 겉을 꾸미고, 붉은색 술끈을 매다는 등 조선 후기 궁중 장황(粧䌙)의 전형을 보여주며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글씨는 이전의 정조어필과 달리 획이 두툼하고 파임과 갈고리가 강조된 점에서 북송 소식(蘇軾)의 서풍이 엿보인다. 정조가 재위 후반에 모범적인 글씨로서 당 안진경(顔眞卿)·유공권(柳公權)과 안진경을 배운 북송 소식을 중시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 「제문상정사」의 서풍 경향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서축은 정조가 1791년 2월에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를 떠나보내며 써준 「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과 함께 임금과 신하의 깊은 의리를 보여주는 소중한 필적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옛글씨』조선왕조 어필(문화재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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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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