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2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창간되어 1936년 9월 4일 폐간된 재일조선인 신문이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책임비서였던 김학의(金鶴儀, 이명 김천해), 이운수(李雲洙), 박태을(朴台乙) 등이 재일조선인 노동자의 문화 향상과 사회적·계급적·민족적 자각을 환기할 것을 목적으로 창간했다.
재일조선인 노동자를 주요 대상으로 한 조선어 신문이었다. 1935년 12월 31일 창간 준비호를 발행하고, 1936년 2월 창간호를 발행했다.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가나가와(神奈川), 나가노(長野), 아이치(愛知), 이시카와(石川), 도야마(富山), 니가타(新潟), 나라(奈良) 지역에 11개의 지국을 설치하여 월 1회, 약 4,000부를 발행했다.
발행인 및 편집인이 조선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치안당국의 극심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신문배포망을 이용하여 좌익분자의 규합과 통일을 시도하고, 일반 재일조선인의 융화·친목단체에 잠입하여 민족의식을 유발시켜 공산주의가 다시 대두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이유로, 1936년 7월 일본의 치안당국이 김학의, 김두용(金斗容), 박태을, 이운수 등 신문발행 및 편집 관련자 17명을 검거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36년 9월 4일자로 폐간 되었다. 지면의 내용은 주로 재일조선인 아동의 교육문제, 조선인의 현안 문제인 도항문제, 주택문제, 차별대우 문제, 취직 실업 문제 등을 다루었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핵심 멤버들이 창간한 신문으로,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발간하고, 재일조선인의 생활상 현안을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