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大阪)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언어가 통하는 조선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선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든 일종의 의료조합이다. 조합원의 출자로 운영되는 조합은 아니지만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1930년 1월에 개설하여 1931년 9월 폐쇄하였다.
오사카(大阪) 거주 조선인들이 언어가 통하는 조선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1930년 1월초에 오사카의대 출신의 정구충(鄭求忠) 등이 중심이 되어 ‘실비진료소’를 개설하기로 하고 30여 명으로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1월 27일 동아통항조합준비회 사무소에서 열린 후원회창립총회는 동아통항조합준비회 간부 현길홍(玄吉弘)의 사회로 열렸는데, 선출된 임원 가운데에는 동아통항조합준비회 간부(전형위원: 문창래(文昌來)·현석헌(玄錫憲)·문길홍(玄吉弘)·윤혁제(尹赫濟) 등)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사무소는 조선일보 오사카총판매소에 두는 등 출발 당시부터 이 지역의 민족운동세력과 관련이 깊었다. 실비진료소는 정구충과 민찬호(閔瓚鎬) 등 의사와 조선인 간호사를 갖추고 2월에 개업하였는데, 개업 당일부터 6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실비진료소는 1년 후인 1931년 2월 2일에 설립 1주년을 맞이하여 정구충이 진료소를 조선인무산자대중에게 제공한다고 발표하고 이를 위해 실행기관을 조직하여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 때 명칭을 오사카조선인무산자진료소(집행위원장 정구충)로 개칭하였고, 진료확장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6월에 신재용(申載容)을 국내에 파견하는 등 진료소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그 해 8월 21일에 열린 실행위원회 임시대회에서는 조선인이 다수 밀집한 니시나리(西成)구와 히가시나리(東成)구에 분원을 설치하기로 하고, 무산자병원설립실행위원회 가맹을 결정하였다.
9월에는 분원이 개원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단체설립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9월 11일에 경찰에 폐쇄명령을 받고 간판까지 압수당하였다. 폐쇄명령을 받은 진료소는 12일에 대책위원회와 13일의 확대위원회를 통해 폐쇄를 결정하고 재산관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후 재산관리위원회에서 “일본인 의료기관(일본무산자의료동맹:일본공산당계열)의 지도 아래 분원을 설치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막을 내렸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의료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만든 의료조합이다. 1930년에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7만여 명이 넘었으나 민족차별과 언어 문제로 인해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개설되었다. 그러나 당국의 탄압에 의해 개설 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쇄되었다. 폐쇄의 직접적 원인은 당국의 탄압이지만 몇몇 급진적 활동가들이 계급운동을 위한 토대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일본당국의 탄압을 초래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1930년대 초기 大阪지역 협동조합과 조선인운동」(정혜경, 한일민족운동학회, 『한일민족문제연구』1, 2001)
「大阪無産者診療所の鬪い」(外村 大, 在日朝鮮人運動史硏究會, 『在日朝鮮人史硏究』20호,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