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이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한반도에서 경제적 곤란의 해결 및 학업 등을 목적으로 일본 열도에 도항하여 살던 한인들과,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총동원 정책으로 일본내 군수사업장에 동원되었던 한인들이 일본의 패전 직후부터 1950년 사이에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간 상황을 일컫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당시 일본 열도에는 약 200만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었던 한인들은 물론, 1920~30년대부터 경제적 곤란을 해결하고자 일본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도 대거 해방된 조국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귀향길에 올랐다. 한인들의 귀환 수단은 오직 선박이었고, 주된 귀환 항구는 규슈[九州]의 하카타[博多], 모지[門司], 사세보[佐世保], 야마구치[山口]현의 센자키[仙崎], 교토[京都]부의 마이즈루[舞鶴], 홋카이도[北海道]의 하코다테[函館] 등이었다. 한정된 귀환 선박에 비해 귀환 희망자가 월등히 많았으므로, 상기의 항구에는 승선 차례를 기다리는 수많은 한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들 중에는 기약 없이 승선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자력으로 배편을 마련하여 귀환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을 점령 통치하던 SCAP(연합국군 총사령관)은 일본경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한인 귀환자의 소지금(1천엔 한도)과 소지품 무게(250파운드 한도)를 제한하였다.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각고 끝에 모은 재산을 버릴 수 없거나, 이미 고향에는 생활의 근거가 없어서 당장 귀환하지 않고 잔류하는 동포들도 적지 않았다.
1946년 이후 남한의 생활 환경이 좋지 않다는 사정이 재일 한인들에게 전해지자 귀환자의 행렬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SCAP은 일단 재일 한인들의 귀환을 종용하기도 했지만, 결국 1946년 12월 15일에 귀환 업무를 종료하였다. 그 후 1950년까지 소수이지만 자력으로 귀환하는 한인들도 있었다.
SCAP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45년 9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조국으로 귀환한 일본거주 한인은 94만 5848명이었다. 단 당국의 지시에 의한 계획수송 이외에 사적으로 배편을 강구하여 귀환한 사람들을 포함하면 귀환한 한인은 총 15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