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히가시쿠조 한인촌은 JR 교토역의 남쪽과 가모강의 서쪽 사이에 위치하는 교토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피차별 부락민이 밀집해 거주하였던 지역으로 1920년대에 대규모 토목공사에 고용된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패전 직후 암시장이 형성되면서 한인 인구가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나 행적 당국의 방치로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다. 1970년대부터 지역 주민들의 요구로 행정 지번이 부여되고, 전기와 상수도가 공급되었다. 1992년부터 매년 11월에 ‘히가시구조 마당’이라는 한인들에 의한 문화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히가시구조〔東九条〕로 불릴 뿐, “한인촌(코리안타운)”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JR교토〔京都〕역에서 남쪽으로 가와하라마치〔河原町〕 거리를 따라 도보로 가면 머지않아 불고기집, 김치 가게, 빠칭코 가게, 선술집 등 한인들이 하는 점포들을 볼 수 있다.
히가시구조는 이미 1960년대 초에 주민 3만명 중에 3분의 1정도가 한인이었다. 원래 이 지역에 살던 한인들의 주된 직업은 폐지, 헌옷, 고철 등을 수집하여 파는 고물상이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 속도가 떨어지면서 고물상 운영으로는 이윤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적지 않은 한인 젊은 세대가 거주 환경이 열악한 이 곳을 떠났다. 지금은 대개 1세를 중심으로 한 고령자 세대가 많은 편이다.
히가시구조 중에서도 특히 가모강과 다카세〔高瀬〕강의 사이에 끼어 있는 히가시 마츠노기〔東松ノ木〕 지구는 한인 거주자의 비율이 60%를 넘는 곳인데, 주거 환경이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행정 당국으로부터 ‘불법 주택’으로 취급받아, 전기와 수도는 물론, 지번조차 없이 소위 ‘0번지’라며 방치된 적이 있으며, 일본 영화 「박치기」(이즈츠 가즈유키 감독, 2004년)의 무대가 된 곳이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지역 주민들의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행정 지번의 부여 및 전기와 상수도가 공급되었다. 최근에는 소위 ‘불법주택’도 대거 정비되어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게 되었다.
교토의 히가시구조〔東九条〕는 에타〔エタ〕 및 히닌〔非人〕 등의 근세 유래의 피차별 부락민이 메이지〔明治〕기에도 교토의 시치조〔七条〕에서 구조〔九条〕에 걸쳐 다카세〔高瀬〕강 연안 지역에 대거 밀집 거주하였던, 소위 “숭인(崇仁)지구”의 일부와 겹친다.
이 곳에 한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당시의 국철 도카이도선 공사라든지 히가시야마〔東山〕 터널공사, 가모강의 침식방지 토목공사, 구조 거리의 확장 공사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고용되었던 노동자라든지 교토의 전통 섬유산업 중 하나인 유젠〔友禅〕 관련의 염색공장이 많아 그 말단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기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들은 가모강 기슭이나 하류의 히가시구조 지구에 임시 변통으로 판자집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피차별 부락민들은 한인들이 자기들 생활구역에 들어와 사는 것을 같이 차별받는 존재이니까 묵인하였다.
일본 패전 직후에는 하치조〔八条〕대로 일대(지금의 JR신칸센〔新幹線〕 교토〔京都〕역 하치조역 입구)에 등장한 큰 암시장 때문에 한인의 인구가 현저하게 증가했다. 1세들 중에는 조국에 귀환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쿄토역에 들렀던 사람도 적지 않았고 한다. 당시 작은 개찰구가 하나밖에 없던 교토역 남구 부근에는 수많은 조선 아주머니들이 암시장에 쌀을 사러 나오느라 혼잡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지고자 1992년부터 매년 11월에 ‘히가시구조 마당’이라는 한인들에 의한 문화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일본국적 취득자가 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재일한국 · 조선인에게 민족 문화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