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2월에 공립협회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을 이루고 국민회가 창립되면서 기존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고 재러한인들의 실업 진흥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21일에 설립된 아세아실업주식회사(亞細亞實業株式會社)가 태동실업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태동실업주식회사는 1908년 2월부터 자본금 총액을 5만 달러, 매주 50달러씩 1천주 모집을 목표로 주식모집광고를 내어 12월 초까지 1천 6백여 달러를 모집하고, 정재관·이상설·김성무를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사무원으로 선출하여 원동지역으로 파견하였다. 김성무는 북만주 미시(密山) 봉밀산(蜂蜜山) 일대의 중국인 토지를 매득하고 이 일대의 토지를 개척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봉밀산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으로서 항카호(興凱湖) 근처에 위치하여 물산이 집중되었고 수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이것을 한인이주촌으로 개척하고자 했다. 김성무는 1910년 1월 태동실업주식회사 자금 총 3,500루블을 송금받고 개척사업에 착수하였다.
태동실업주식회사는 1910년 5월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상설위원회를 설립해 임원을 선정하고 고본표(股本票)를 제조하여 각 주주에게 발급하는 등 활발한 모금활동을 전개해 1910년 5월까지 2,095달러를 모집해 투자하였다. 투자금으로 가옥 건설과 도로 설비와 농업경영에 필요한 농기구 등을 마련하였다. 1911년 7월경, 토지등기를 마치고 18칸의 사무실 건물과 35호의 민가가 들어서 만주,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봉밀산 지역 3곳에서는 150여호, 100호, 50호의 한인촌이 형성되었고 이들 외에 약 200호 정도 한인들의 호수가 각지에 산재해 있었다.
태동실업주식회사의 토지개척사업은 현지 중국인으로부터 임대한 토지와 필요한 용구를 갖추고 농업경작에 착수했으나 마적의 행패가 심하여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개인사유지가 아닌 국유지를 구매하였고 한편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은 토지 소유권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봉밀산의 개척사업은 국민회의 정식 투자사업으로 진행되었지만 자금 부족과 흉년, 이주 한인들이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미시(密山) 일대는 만주와 러시아를 이어주는 한인들의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었다. 1916년 홍범도는 빈민 3백여 호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한흥동에 소학교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