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당도한 이승만이 한인들에게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할 방안으로 1913년 9월 1일 월간 국문잡지인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후 이 잡지는 재정난과 이승만의 개인사정, 그리고 기타 사정 등으로 약 12년간 휴간하기도 하였으나, 1930년 12월 13일까지 간행되었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기 전 박상하 · 정칠만 등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유력 인사들은 영자신문 발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1912년 늦은 여름부터 이승만의 하와이 초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막상 하와이에 도착하고 보니 영자신문 발간은 중단되고 대신 학교설립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조치에 크게 반발하였고 그러자 하와이 한인사회의 유력 인사들은 학교설립 계획을 취소하고 영문잡지 발간을 위해 모금활동을 재추진하였다. 이승만은 하와이 각 섬을 순회하며 강연과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모금 성적이 부진해 인쇄기 구입 및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영문잡지 발간을 중단하고 차선책으로 국문잡지 발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태평양잡지』는 마침내 1913년 9월 1일 월간 국문잡지로 발행하게 되었다. 잡지는 정치 · 종교 · 교육 · 과학 · 문학 등을 망라한 종합적인 성격의 것으로 하였고, 가격은 처음 1∼2호 때 25센트로 했다가 이후부터 20센트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잡지 발간은 구독료 수입으로는 맞출 수가 없어 지속적인 발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태평양잡지』는 이승만의 개인적인 노력과 헌신에 의해 발간되었다. 그는 사장 겸 주필로서 간사원 안현경, 인쇄인 문순익과 함께 잡지발간을 주도하였다. 이승만을 제외하고 『태평양잡지』의 주필을 맡은 인물은 노진구, 민찬호, 지용은, 김영우, 송필만, 윤치영, 김현구 등이다. 『태평양잡지』는 자금부족으로 잦은 휴간을 반복하였으나, 1930년 12월 말 발간의 당위성과 확장의 필요성을 느낀 이승만과 동지회에 의해 『태평양주보』로 변경되어 오히려 더 확장, 발행되었다.
『태평양잡지』는 처음 한인감리교회의 인쇄시설을 이용하다가, 1914년 2월호부터 일본에서 들여온 5호 주자를 이용하여 발행하였다. 표지의 제목과 기사 제목 옆의 그림과 지도 등은 이승만이 직접 그려 넣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태평양잡지』를 발간할 때 영문판을 겸하여 발행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시작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서두 목차에 영문 목차가 첨부되었다. 실제 영문기사가 실린 것은 1923년 3월호인데, 『태평양잡지』 영문부에 의해 영문 논설을 싣고 있었다. 발행 부수는 대략 500부 내외였고, 하와이를 비롯해 미주와 극동에까지 배포되었다.
『태평양잡지』는 종합 월간지의 형태를 띠고 있어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로 게재한 기사는 국제정세와 외국사정 및 외국지도자의 동정, 동서양의 정치사상과 정치제도, 미국의 대내외 정책과 지도자 동향, 민중계몽과 풍습개량,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의 실상, 민족단합론과 인심합일론, 사회주의 · 공산주의의 비판과 기독교민주주의의 강로, 한국기독교의 동향과 민족운동가의 동정, 이승만과 임시정부 노선의 옹호 및 반이승만 세력의 비판, 동지회 및 이승만 관련 단체의 소개 및 홍보, 번역 · 번안한 일기와 소설, 사고 및 광고 등이다.
1930년대 이전 하와이 한인사회의 면모와 이승만의 사상과 활동을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한글 잡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