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공식적인 대형 무도회는 1905년 11월 6일에 경성의 청나라 공사관에서 행한 ‘무도연회’(蹈舞宴會)’였다. 이 무렵 무도회 내지 도무회(蹈舞會) 소식이 종종 신문에 기사화되었는데, 대한제국에 들어와 있던 열강 각국의 외교관이나 선교사, 유학생, 조선의 고관 귀족 등이 외교와 교제를 위해 서양의 무도회를 행했던 것이다. 서울의 정동에 있던 손탁호텔에서 무도회가 자주 열렸다. 또 1915년에 조선호텔에서 열린 벨기에구제자선음악회는 참가자들이 연회복을 입고, 이왕직 양악대의 반주로 춤춘 서양식 무도회였다. 1917년에 다동기생조합의 연주회에서 기생들이 서양무도를 처음 춤추기도 했다.
그러나 무도회가 일반의 문화행사로 널리 행해진 것은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의 고국순회공연 이후였다. 이 블라디보스톡 교포 청년학생들이 행한 음악무도회가 문화적 충격을 주었으니, 당시 지식인이었던 학생들이 무대에서 직접 춤추었다는 점과 계몽적 자선적 취지로 무도회가 열렸다는 점에서, 춤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후 무도회는 크게 유행했다. 경성의 학교와 교회들은 강연이나 체육 행사에 무도회, 음악무도대회, 음악가극무도회 등을 병행했고, 기금 마련을 위한 무도회도 자주 열렸다. 김동환이 1922년에 6월호 『개벽』에 실은 「무도란 여하(如何)한 것인가」에서 무도를 무대무도와 사교무도로 분류하며, 사교무도는 5, 6개월이면 배울 수 있는 춤이지만 예의작법(禮義作法)을 알아야 하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무도학원도 생겨서 박시몬, 이병삼이나 러시아 무용수를 초청하여 사교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5년에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체육부에 무도과를 두어 강습회도 개최했다.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무도회는 서양문화에 대한 지향이 있었기에 선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사회 행사와 결합시키면서 1930년대에도 행해졌다. 원래 서양의 사교춤(Social Dance)이나 민속춤(Fork Dance)은 대중들이 즐기는 춤이었지만, 이 춤들이 무도회에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