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춤은 갑오경장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의 근대 시기에 추어진 한국과 서양의 춤이다. 근대 시기의 춤으로 고유의 전통춤, 발레·모던댄스·사교춤 등 서양춤을 포함한다. 또 최승희 등이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전통춤을 재창작한 신무용도 근대춤에 포함된다. 근대춤이 시작된 때는 대략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1900년 무렵이다. 이 시기에 관기제도가 철폐되고 서양식 극장이 생기면서 춤도 변화하게 되었다. 근대춤의 기점이 될만한 공연은 1902년 협률사의 ‘소춘대유희’이다. 근대춤은 춤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근대춤이 시작된 때는 대략 1900년 무렵이다. 개화와 더불어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제도와 사상이 변하기 시작하며 근대춤도 시작되었다. 전통춤(일제강점기에는 조선춤이라 칭했다.)의 변화는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사회제도와 예술환경이 변하면서 서서히 일어났다. 변화의 원인과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관기제도가 철폐되면서 기생의 위상과 활동방식이 바뀌면서 춤도 변하였다. 1908년 기생에 대한 관리감독이 장악과에서 경시청으로 이관되었고, 기생은 기생조합과 권번에 소속해 활동하게 되었다. 기생의 활동기반과 방식이 바뀌자, 춤도 바뀌었다.
둘째, 1900년대 협률사, 광무대, 장안사, 단성사 등의 서양식 극장이 생기고, 극장을 중심으로 춤이 공연되기 시작하면서, 열린 무대가 아닌 액자형의 전면 무대에 맞게 춤의 구성이 변하였다. 또한 계급별로 다르게 유통되던 춤이 극장을 매개로 유통되게 되었다. 관객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춤꾼은 출연료를 받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궁중무와 민속춤 뿐만이 아니라 「지구무」, 「서민안락무」, 「전기춤」, 「사고무」 등의 새로운 춤도 창작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갈수록 「승무」, 「한량무」, 「검무」, 「입춤」 등의 민속춤들이 많이 추어졌고, 1937년에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만들면서, 전통춤을 무용 예술로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시작되었다. 이 춤들을 고전무용이라 칭하였다.
해방이 되자 전통춤의 공간은 확대되었지만, 1950~60년대에 신무용의 위세에 눌려 전통춤의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다만 각 지역에 국악원, 민속원 등이 생기며 명맥을 유지했고, 문화재보호법(현, 국가유산기본법)이 시행되며 전통춤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근대춤에서 가장 큰 변화는 서양춤의 수입이었다. 서양춤의 수입으로 인해 춤에 대한 인식과 춤 문화가 변하게 되었고, 한국 춤 문화의 지형이 다양해진 것이다. 서양춤들은 주로 일본을 통해 들어왔는데, 먼저 서양의 사교춤(Social Dance)과 민속춤(Folk Dance)이 들어왔다. 경성에 있던 서구 열강의 영사, 외교관, 상인 등이 이 춤들을 먼저 추었고, 1910년대 중반부터 기생들이 추기 시작하더니, 1921년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의 전국순회공연 이후 일반에 확대되었다.
이들의 공연을 계기로 춤은 기생이나 재인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출수 있으며, 천한 기예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학교나 교회 등이 개최한 음악무도회에 러시아의 코사크춤, 유럽의 민속춤들이 추어졌다. 사교춤은 일제강점기 후반에 도시의 유흥과 함께 유행하여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카페 등에서 추었다. 해방 이후에는 남녀가 부둥켜안고 추는 퇴폐적인 춤으로 인식되었다.
다음으로 1913년 덴카스곡예단에 의해 레뷰춤이 들어왔다.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주요 대상으로 공연했으나, 조선인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레뷰에서 추는 레뷰춤은 밝고 화려하며 곡예적이고 감각적인 춤으로 「우의무」, 「서양춤」, 「각국춤」, 「바다의 마녀」, 「청춘댄스」 등을 추었다. 이후 배구자 등이 레뷰춤을 추었고, 1930년대부터 막간극이나 악극 등에서도 레뷰춤이 추어졌다. 재즈댄스나 탭댄스도 수용하며 레뷰춤이 확대되었고, 1950년대로 넘어가면 유랑악극단이나 쇼단의 공연에서 추어졌다. 1960년대에 TV방송의 쇼나 방송국 무용단의 춤으로 흡수되었다.
교육무용도 수입되었다. 1910년대부터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학교제도가 시행되며, 체육 과목에 율동, 유희로서 무용이 교육되었다. 원래 교육무용은 단순한 유희, 율동이 아니라, 무용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고 표현력과 창의성을 육성하는 것이지만, 식민치하에서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육무용이 전개되지 못했다. 다만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창의성과 표현력을 갖춘 교육무용이 부분적으로 행해졌을 뿐이다. 해방 후 함귀봉이 주도한 조선교육무용연구소의 활발한 사업으로 무용 교과목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1950년대부터 체육 안에서 무용교육이 전개되었지만 활발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전문 무용예술로는 처음으로 1926년에 모던댄스(Modern Dance)가 도입되었다. 1926년 3월에 일본의 신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경성에서 공연했는데, 그는 전년에 유럽에서 귀국 후, 달크로즈의 리드믹, 이사도라 덩컨의 뉴댄스, 마리 뷔그만의 표현주의 모던댄스 등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는 춤들을 선보였다. 「수인(囚人)」이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계기로 최승희와 조택원이 그의 문하로 들어갔고, 1930년부터 최승희가, 1934년부터 조택원이 무용발표회를 통해 모던댄스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시이 바쿠가 보여준 모던댄스의 경향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택원의 유럽공연과 최승희의 세계공연을 계기로 전통춤을 모던댄스 기법으로 창작하기 시작하며 모던댄스 작업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제자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다가 박외선이 1950년대에 이화여대에서 모던댄스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의 제자 육완순의 미국 유학으로 마사 그라함의 모던댄스를 수입하면서 유럽 계열과는 다른 미국 모던댄스가 1960년대에 수입되기 시작했다.
발레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발레 공연이 경성에서 있었지만, 일본에서 수학한 한동인이 해방 이후 서울발레단을 창단하여 고전발레와 창작발레를 공연함으로써 정착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임성남이 귀국하여 본격적인 발레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스페인춤, 남방춤(남아시아춤)도 추어졌는데, 이는 최승희의 동양발레론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이 춤들은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캐릭터댄스로 전문화되거나 사라졌다.
전통춤과 서양춤 외에 새롭게 탄생한 춤이 신무용이다. 신무용은 최승희와 조택원에 의해 양식화되었는데, 전통춤을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재창작한 춤이다.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1934) 이후 「장고춤」, 「초립동」, 「무당춤」, 「보살춤」 등과, 조택원의 「가사호접」, 「만종」, 「춘향조곡」 등이 신무용 작품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월북하고 조택원은 귀국하지 못한 상태에서, 1950년대에 최승희의 제자 김백봉을 비롯하여 여러 무용가들에 의해 북한춤과는 다른 남한의 신무용이 전개되었다. 대형무대에 맞게 군무를 확대하면서 도약과 회전, 대형의 변화 등을 꾀했고, 단편 무용극들도 시도되었다.
한국의 근대춤은 전통시대와 달리 춤의 주체, 춤의 공간, 춤의 종류, 춤의 유통방식, 춤의 교육기관과 춤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한국 현대시대의 춤으로 나아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근대춤 기간에 전통춤들은 민속현장에서 계승되면서 동시에 무대화되었고, 다양한 서양춤들이 수입되면서 춤 문화는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춤이 공연예술로서 안착하기 시작했고, 기생이나 재인 출신이 아닌 무용예술가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근대춤의 기점이 될만한 공연은 1902년 협률사의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였다. ‘소춘대유희’에서 기생들이 처음으로 서양식 극장무대에서 춤추었고, 일반을 대상으로 흥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편의 공연으로 기점을 설정하기보다 사회전반의 변화를 살펴본다면, 1894년 갑오경장으로부터 1921년 해삼위학생음악단 전국순회공연까지를 근대춤에 진입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발레와 모던댄스(현대무용)가 점점 전문화되어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무용에서 창작춤이 시도되고, 모던댄스의 창작이 활성화되기 시작되면서 현대춤으로 넘어간다. 한국의 근대춤은 왕조시대처럼 계급적으로 구분된 춤 문화가 아니었으며, 작품 내적으로 근대적 정신을 표현했고, 근대적 유통체계에서 소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