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결성에는 한성준을 중심으로 김석구, 김덕진, 김선, 장홍심 등이 참여했고, 1938년에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남녀회원이 30여명에 달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조선무용을 발전시키고,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경기, 충청 지역 출신의 음악가들의 연합체를 만들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1920년대까지 음악무용 전문집단은 극장과 관계를 맺으며 흥행 집단화했던 것이 특징이라면, 1930년대 이후로 결성된 음악 혹은 무용의 전문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며, 특정 사승계보나 지역성을 중심으로 계파를 형성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1930년대 이후로 결성된 음악 및 무용 전문집단은 집단 구성원의 성격이 공연 레퍼토리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직접적인 흥행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전문 공연활동을 벌이면서 예술적 역량을 확장시켰고, 경우에 따라서는 학습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남도 음악과 무용의 경우, 1915년에 경성구파배우조합, 1920년에 광월단이 결성되었으나 흥행이 집단의 결속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도가무의 전문성이 이들을 통해 분명히 부각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928년 호남출신 음악가들이 호남악우회를 결성했고, 이를 1930년에 조선음률협회로 발전시켰고, 최종적으로 1934년에 조선성악연구회로 귀결시키는 과정에서 전라도 출신 음악가들은 남도음악에 대한 지도력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비호남출신 음악가들 중 남도음악의 전문가들은 점차로 남도음악계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충남 홍성 출신 한성준은 과거 경성구파배우조합의 구성원으로서 참여한 원로급 예술가이자 조선성악연구회의 임원의 경험을 살려 별도로 경기도이남 출신 및 충청도 음악가들을 규합하여 한성준의 장기였던 무용을 명분으로 단체를 따로 결성했다.
무용을 앞세우는 과정에서 경기 및 충청 출신 기악 연주자들이 이 집단에 대거 참여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다룰 수 없었던 여러 가무와 연희 그리고 기악음악들이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용을 중심에 놓는 과정에서 경기 충청지역에서 발전했던 중고제 판소리는 발전하지 못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육자배기토리의 남도 가무 전문단체로서 조선성악연구회의 세에 대항하기는 어려웠지만, 창극에 주력했던 조선성악연구회와 달리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육자배기 토리권의 기악 음악과 무용 공연에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