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동경에서 주로 아동교육무용 혹은 건강무용운동(健康舞踊運動)을 주도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한국 교육무용을 위해 힘썼다. 6·25전쟁 때 북한으로 갔다.
충청북도 청주(淸州)에서 출생했다. 청주고보(淸州高普: 중등과정) 3학년이던 1929년에 ‘청주만세학생’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1930년 2월 17일에 석방되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가 1930년대부터 8·15해방까지는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일본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문부성(文部省) 교육검정시험에 패스하여, 이시이 바쿠[石井漠] 문하에서 고전바레에 입문하였다. 강구연구소(江口硏究所)에서 신흥무용을 학습하고, 도중풍(島中豐)에게 무용을 사사, 해방 이후 귀국하여 교육무용계의 권위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한 함귀봉은 1946년 6월에 결성된 조선무용예술협회(朝鮮舞踊藝術協會)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7월 23일부터 1주일간 군정청 문교부의 후원을 얻어 ‘해방 제1회 하기보육강습회’를 개최하여 교육무용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해 9월 조선교육무용연구소를 문교부 승인을 얻어 개설하였고, 춤 창작과 교육 전공자들을 모집하여 3기생까지 배출하였다. 또 10월에는 명동에 아동무용연구회(兒童舞踊硏究會)를 설치하였다. 1949년 문교부예술위원회(文敎部藝術委員會) 무용위원이 되었다. 그해 5월에는 장추화, 김막인, 정동방, 조용우, 한동인, 조익환, 박용호, 구원민과 함께 현대무용가집단(現代舞踊家集團)을 결성하여 단체의 대표가 되었다. 함귀봉은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과 마리 뷔그만(Mary Wigman)의 현대무용을 기초한 교육무용의 정착과 전파에 힘썼다.
6·25전쟁 때 북한으로 가 인민군협주단에 소속되었다가 최승희의 평양 귀환과 함께 최승희무용학교 교사로 일했다. 1958년 당의 명령으로 최승희를 반역자로 모는 비판에 앞장섰다가 결국 자신도 1964년 여름 행방불명되었다.
1971년에 건립되었으나 유실되어 1997년 재건된 청주중학교 교정에 있는 항일학생의거기념비에 이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