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한동현(韓東玄), 일본 이름은 기요하라 세이지[淸原誠]다. 강원도 고성군 고성면 동리에서 부친 한기태와 모친 김인해의 사이의 3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고성 회양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배화중학교에 입학했다. 부친은 그가 의사의 길을 걸어갈 것을 기대했지만, ‘장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하루 종일 음악만 들을 정도로 사색적이었던 그는 돌연 발레를 배우겠다며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7세 무렵이던 1938년경 한국춤의 대부인 한성준에게 1년 가량 한국의 전통춤을 배웠다. 그는 일본으로 가서 곧바로 엘리아나 파블로바(Elianna Pavlova)의 제자가 되어 러시아 정통발레를 체득하고, 1943년 서울로 돌아왔다. 해방 직후 무용계에서 결성한 조선무용건설본부와 조선무용예술협회에 중추적으로 참여하며 핵심적인 인물로 부각되었고, 특히 한국 최초의 직업발레단인 서울발레단 창단과 함께 무용계의 중진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서울발레단 제5회 정기공연의 두 번째 날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연은 취소되었고, 피난을 가지 못해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인민군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북한에서 확인된다.
한동인은 예술급수 2급으로 인민군협주단 부단장을 맡았다가 나중에는 단장이 되면서, 한동안 북한 무용계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피바다식 혁명무용극의 주체무용이 강화되면서 점차 활동이 뜸해졌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레를 소개하는 글을 썼고, 조선무용의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던 그는 아카데미즘의 첫 시도자, 무용 기업화의 시도자, 발레운동의 주창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탁월한 안무력으로 창작발레를 만들었던 한국발레의 개척자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