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균 ()

무용
인물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안무가. 연출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7년
사망 연도
2008년
출생지
함경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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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안무가. 연출가.
생애 및 활동사항

직업안무가 제1호로 함경남도 삼방(三防)에서 출생했다. 배병인과 남양 홍씨 부인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삼방의 신고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중학교와 경성상고를 졸업했다. 경성상고 졸업 후 삼방으로 귀향해 신고산 금융조합에서 1년 동안 서기로 근무했다. 그 후 삼방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며 학예회 및 연극 「장화홍련전」의 연출 등 교내 행사를 책임졌는데, 당시 3살 밖에 안 된 조카 배정혜(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리을춤연구원 이사장)가 파랑새 역을 맡았다. 해방 후 배정혜(당시 6세)의 본격적인 무용 교육을 위해 서울로 왔다. 식량영단(1945년 10월 조선생활필수품회사로 개칭) 산하 중외흥업 주식회사 경리과장으로 있다가, 1949년 세무사가 되어 중부 세무서 간접세무과에 근무하다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안무가와 연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5년 배명균의 나이 28세, 배정혜의 나이 12세에 제1회 배정혜 무용발표회를 개최했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 만수무강경축공연을 서울의 시공관에서 하루 4차례 공연했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 「남아의 의지」·「참새춤」·「부채춤」·「장고춤」「황진이」 등이다. 1958년 제2회 배정혜 무용발표회에서 「황진이」·「풀잎」·「북춤」·「천국과 지옥」 등을 안무했다. 1969년 제3회 배정혜 무용발표회에서 「청산별곡」·「각설이」·「주마등」·「백팔염주」·「가랑잎」 등을 안무했으며, 19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최선 안무의 「가잿골이야기」를 연출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후 1986년 광주시립무용단의 「심청전」 안무 등 2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했다. 배명균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200여 편의 한국 창작 무용을 안무해 ‘무대 뒤 춤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유명한 무용가들의 해외공연 안무와 개인발표회의 연출을 담당하며 무용계의 숨은 안무가로 맹활약했다. 2008년 별세 전까지도 리을무용단의 춤을 안무했다. 그의 작품은 자연 친화적인 소재와 동양적인 정서 그리고 일상적인 삶과 밀착되어 질박한 한국인의 삶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다.

상훈과 추모

그의 춤은 리을무용단과 배명균 산조춤보존회, 배정혜 춤아카데미를 통해 후학들에게 전승되고 있으며, 지난 2009년 배명균 선생 추모 1주기 공연 「영원한 舞客의 아름다운 혼」(제24회 리을무용단 정기공연)이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다.

참고문헌

『춤과 그들』(유인화, 동아시아, 2008)
「배명균 선생 추모 1주기 공연 팸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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