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문 ()

무용
인물
해방 이후 부산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 한국춤평론가회 회장 등을 역임한 평론가. 춤평론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3년(호적상 1919년)
사망 연도
1992년
출생지
함경남도
정의
해방 이후 부산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 한국춤평론가회 회장 등을 역임한 평론가. 춤평론가.
생애 및 활동사항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면 용현리에서 부친 강통운과 모친 정송죽의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호는 여천(黎泉)·취운(翠雲), 호는 프른 구름·국석(國石)이다. 첫돌이 될 무렵 부친이 사망한 후 외가에서 자라며 유치원 교육까지 받고, 한국인의 입학이 쉽지 않았던 함흥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학도병 입대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월간지 『무궁화』와 『신생』의 편집장을 맡는 한편 무궁화가무극단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1947년 귀국 후 건국대학교 법정대 정치학과에서 수학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곳에서 활동했다. 1952년 『국제신보』에 「한국 민족 무용의 진로」라는 춤평론을 게재하면서 춤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후 부산 춤계의 발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63년 한성여자 초급대학 체육과에 춤이론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미학과 무용사를 가르쳤고, 1966년부터 부산평론가협회 무용분과 간사로 활동하다가, 1972년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 지부장 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1979년 부산여자대학교에 무용과가 개설되어 무용과장을 맡았고, 1984년 정년퇴임을 했다. 1982년 부산시 문화위원의 직책을 맡았으며, 작고하기 1년 전인 1991년 한국춤평론가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가무악 일체를 축으로 하여 예악관을 중시한 기운생동(氣運生動)의 미학적 산물로서의 한국춤인 국무론(國舞論)을 강조하며, 한국 춤계와 부산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훈과 추모

문화공로예술표창(1972)·한국예총예술공로상(1988)·부산시문화상(1993)·20세기 부산을 빛낸 26인상(2004)을 수상하였다. 그의 후학들이 2001년과 2002년에 추모집을 발간했으며[『(강이문 춤비평론집 1) 한국 무용문화와 전통』1(민족미학연구소, 현대미학사, 2001); 『(강이문 춤비평론집 2) 우리춤의 전통과 창조성』(민족미학연구소, 현대미학사, 2002)], 정기적인 학술심포지엄과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강이문의 생애와 업적」(엄옥자·김미숙 외, 『무용예술학연구』, 제4집, 1999)
「무용평론가 강이문」(『국제신문』2007.1.28)
「무용비평가 강이문의 예술관과 비평적 특성에 관한 연구」(박자은,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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