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웅 ()

언어·문자
인물
해방 이후 『국어음운론』, 『우리 옛말본』,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
이칭
이칭
눈뫼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8년
사망 연도
2004년
본관
양천(陽川)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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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허웅은 해방 이후 『국어음운론』, 『우리 옛말본』,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918년에 태어나 2004년에 사망하였으며 호는 눈뫼이다.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읽고 국어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해방 후에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국어음운론』(1958)에서 국어의 음운론을 공시적·통시적 기술을 시도하였다. 『우리 옛말본』(1975)에서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하였다.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에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었다.

정의
해방 이후 『국어음운론』, 『우리 옛말본』,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눈뫼. 경상남도 김해 출신. 1942년 12월에 백금석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동래고등보통학교 3년 때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읽고 우리말을 연구하기로 결심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최현배 선생이 강단에서 내려오자 중퇴하고, 낙향하여 15세기 국어 문법을 독학하였다. 해방되어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글학회 회장과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허수와 윤영순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26년에 김해보통학교를 입학하여 1932년에 졸업하였다. 1932년에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병으로 1년간 휴학한 뒤 3학년에 복학하여 1938년에 졸업하였다.

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의 영향을 받아 국어 공부를 결심하고, 1938년에 최현배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최현배 선생이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강단에서 내려오자 1939년 3월에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독학하였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폐침윤(肺浸潤) 질환으로 고향에서 요양하였는데 이때부터 15세기 국어 문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창원에 있는 사설강습소에서 서기를 하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 김해에서 한글강습 강사로 활동하였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부산대학교 ·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가, 1957년 5월부터 1984년 2월 퇴임할 때까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퇴임 후에는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고, 2004년까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중국 상하이외국어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71년부터 2004년까지 한글학회 이사장과 회장을 역임한 기간에는 초등학교 한자교육 반대, 한자혼용 반대, 한글날 공휴일 제외 반대, 한글전용법 폐기 반대, 한글날 국경일 제정, 영어 공용어 반대, 한자교육진흥법 반대 등 한글전용운동의 최선두에서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를 연대순으로 꼽으면 다음과 같다.

『국어음운론』(1958)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국어의 음운론을 공시적 · 통시적으로 기술한 저서이다. 『언어학개론』(1963)은 유럽과 미국의 다양한 언어학 이론을 바탕으로 국어학의 독창적인 체계를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이다.

『우리 옛말본』(1975)은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한 역저이며, 옛말 연구의 결실이다. 이어서 16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16세기 우리 옛말본』(1989)으로 펴냈다. 『국어학』(1983)은 국어학 전반을 공시적 · 통시적으로 기술한 저서이며,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과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은 풍부한 현대말 자료와 독창적인 기술 방법으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은 역저이다.

후학들은 허웅 선생을 “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국어학의 주춧돌을 깔았으며, 외솔 최현배 선생은 그 위에 집을 지었고, 눈뫼 허웅 선생이 그 집을 마무리하였다.” 라고 표현한다. 2004년 1월 26일 87세에 영면하였고, 남양주시 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3년 외솔상,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6년 성곡 학술문화상, 1990년 세종문화상, 1993년 주시경 학술상, 1998년 세종성왕 대상, 2000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2002년 연세 문인상을 수상하였으며, 학문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4년 1월 2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눈뫼 허웅 선생의 삶』(김계곤 외, 한글학회, 2005)
『눈뫼 허웅 박사 환갑기념논문집』(논뫼 허웅 박사 환갑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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