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한수의 출생연도나 출신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11년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혁신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소랑이 1918년 취성좌를 창단하자 취성좌로 옮겨 많은 대본들의 각색, 창작을 맡았고, 연출가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 창작극 「가거라 아버지에게」(1926), 「북극의 사랑」(1929), 「눈물」(이상협 원작·천한수 각색, 1929) 등이 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잠시 연출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에는 신극 창작 및 영화 감독으로도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26년 10월 신파극 배우들과 복혜숙을 비롯한 일부 토월회 배우들이 결합한 극단 조선극우회의 창립공연 4편 중 「기갈」 대본을 창작했으며, 1927년에는 조선 최초의 촬영감독인 이필우와 함께 조선권번의 기생들을 소재로 한 영화 「낙양의 길」을 감독하기도 했다.
1929년 말 취성좌의 핵심 단원들이었던 지두한, 이경설, 이애리수, 전옥, 강홍식, 이경환 등과 함께 조선연극사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이 극단에서 대표 및 대본작가, 연출가로 활동했다. 비극 「눈먼 동생」(슈니츨러 원작, 1929), 「너는 밋치였지만」(1930), 「불여귀」(1930), 희비극 「새벽종소래」(1930), 가극 「경성행진곡」(1930) 등을 각색, 연출했다.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중 갑작스럽게 1930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대표적 신파극단인 혁신단, 취성좌, 조선연극사에서 다양한 장르의 각색과 창작 극본을 쓰고 연출하여 신파극이 좀더 사실주의에 가까운 대중극으로 변모하는 데 기여한 연극인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