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0월 1일 경상북도 선산 출생으로, 부친은 육병형(陸炳亨)이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에 입학하였다.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해, 회지 『흑우』와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23년에는 박열(朴烈), 김중한(金重漢) 등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가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1926년 10월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할 때 참여하였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살림사’를 조직하였고, 옥성농우회(玉城農友會)를 통해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39년 4월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났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2월 발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선산군 지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선산 지역구에서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제헌국회 총선에 가장 많은 수의 후보를 내 전체 의석의 27.5%인 55석을 확보하였다.
제헌국회의 세력 분포는 구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을 병합한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파와 동성회(同成會)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 그 중간을 점하는 신정회(新政會) 및 무소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육홍균은 한민당에 대한 반발 세력으로 구성된 비 한민 세력의 규합체인 동성회의 소장파 의원들이 만든 37의원(三十七議員)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50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후보로 출마하여 경북 선산 지역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 5월 동지회 지도위원을 지냈으며, 1969년에는 토지개량조합연합회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72년 11월 20일 제헌동지회 소속 제헌의원 53명 중 한 명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 참여하였다.
1983년 7월 5일 자택에서 향년 83세로 사망하였다.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고, 1990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