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최대의 비합법 사회주의 혁명조직이었다.
사노맹의 탄생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정치투쟁의 중심 기축 이동과 관련이 있다. 1970년대까지 정치투쟁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으나, 광주항생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거나 노동운동의 성장을 지원하게 되었으며, 그 성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구성되었다. 1985년 말 학생운동은 변혁론을 바탕으로 NL(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진영)과 CA(제헌의회그룹)가 대립하게 되면서 이후 변혁운동진영은 NL진영과 반 NL진영으로 양분되었다.
다양한 전위조직 중의 하나이자 1986년 초부터 활동한 ‘제헌의회그룹’은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에서 활동했던 김철수, 윤성구, 민병두, 최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 사노맹의 전신인 ‘제헌의회그룹’은 레닌의 이원적인 전위당 조직원칙에 따라 ‘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의 분리 지도부를 구성했다.
제헌의회 조직은 1986년 말부터 검거되면서 조직적으로 붕괴되었고, 제1차 제헌의회조직의 중간지도부가 조직을 재건하면서 제2차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로 나섰다. 그들은 조직명을 ‘노해동’이라고 명명했으며, 지도부의 핵심 활동 인물은 박종운, 김정일 등이었다.
1987년 대선투쟁 및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의 의견차를 보인 ‘노해동’의 소수파는 ‘사회주의를 명확히 내건 노동자계급의 전위전당 결성’을 목표로 ‘노해동’으로부터 분리된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범위원회’를 결성했다.
1988년 6월 1일 ‘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 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창립취지문을 작성·배포함으로써 준비위원회 상태에서 조직의 정식 결성을 준비했다. 1989년 11월 노동자대회장에서 ‘남한사회주의주동자동맹’의 정식출범을 선언했다. 조직체계는 중앙위원회·편집위원회·조직위원회·지방위원회 등의 정규조직과 노동문학사·노동자대학·민주주의학생연맹 등의 외곽조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노맹은 1991년 4월3일 조직의 중심인물인 박노해(본명 박노평)가 검거되고, 1992년 4월 29일 조직총책 중앙상임위원장인 백태웅 등 39명이 잇달아 구속됨으로써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