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수의 유치신청으로 인해 부안의 핵 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었다. 부안의 갈등 상황은 정부의 핵에너지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핵 폐기장 후보지 지정 과정을 둘러싼 유사 사례들에서 나타난 갈등의 고리와 연결되어 있다.
1989년 당시 영덕, 안면도, 굴업도 등이 후보지가 되었을 때 핵 폐기물 처분장에 대한 논의와 이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1990년에도 과학기술부가 안면도에 핵 폐기장 건설 계획을 진행하려 했을 때 해당 지역에서 주민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1994∼1995년 덕적도에 핵 폐기장을 건설하려는 정부의 노력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부안의 경우 직접적인 갈등의 촉매제는 부안 군수의 독단적인 유치신청과 더불어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민들이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2003년 6월 중순 울진, 영덕, 장흥, 영광, 고창, 부안의 7개 지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함으로써 핵 폐기장 부지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고창은 의회에 의해, 장흥은 군수에 의해 각각 핵 폐기장 유치 신청이 거부되었다. 뒤늦게 군산시가 핵 폐기장 유치를 철회하자 전북도지사가 부안 군수를 방문했고, 다음날인 7월 11일 부안군수가 핵 폐기장 유치선언을 했다.
7월 5일 군 의회는 유치신청을 부결시켰으나, 부안군수는 14일 단독으로 신청서를 제출했고, 이후 주민들은 다양한 조직들이 참여한 ‘핵 폐기장 백지화 범 부안군민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7월 2일 핵 폐기장 백지화와 군수퇴진 결의대회에 부안주민과 시민단체 약 1만여 명이 참석했고, 폭력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주민저항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고, 시위 과정에서 부상자와 구속자가 다수 발생하면서 갈등상황이 심화되었다.
2003년 10월 3일 고건 국무총리와 부안 대책위는 대화기구 설립에 합의하고 협상했으나 실질적 효과는 없었고, 정부가 연내 주민투표 실시에 대해서 거부의사를 밝히며 대화는 중단되었다. 이후 ‘부안 핵 폐기장 주민투표 중재단’이 구성되어 정부와 주민의 입장을 중재해 2004년 초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방안을 전달함으로써 부안사태가 진정되었다.
2004년 2월 14일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건립에 대한 부안군민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고, 이 투표에서 반대표가 91%로 압도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비록 법적 효력에 대한 논란은 남아있으나, 위도 핵 폐기장 건립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