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충청도 괴산(지금의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출생으로, 호는 원명(圓明)이다. 청안중명학교와 북간도 창동학원, 북경대학을 졸업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국외로 망명, 만주와 남경,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길림 군정서 분서조직, 서기장 참모 등을 역임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고자 국내로 입국, 그리스도교인들이 중심이 된 비밀항일운동단체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 국내정보 수집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1921년 세계한인동맹(世界韓人同盟會), 1922년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1929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1934년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1935년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등의 조직에 참여했다.
한편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李甲寧) 저격사건에 연루되어 1937년 체포되어 1944년까지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환영회 영접부장,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한국독립당 선열사적조사위원장 겸 훈련부장, 대한민국정무위원 겸 농민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괴산군에서 당선되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대한국민당 후보로 괴산군에서 당선되었다.
1963년 사망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1월 11일에는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 소재한 생가가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