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4월 21일 경상남도 창녕 출생으로, 영산공립보통학교와 서울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었고, 출옥 뒤 주시경에게 우리말과 글을 배우고 “일본을 알아야한다”며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 경상남도 밀양군 북면 사립 정진학교의 설립교장과 목포여자고등학교 교장, 마산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30년 천도교청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31년 5월 13일 천도교 청우당 노동부에서 조직한 조선노동사(朝鮮勞動社)에서 부위원장 겸 경제부장을 맡았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 경남 고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밀양군지부 위원장과 조선과도입법의원을 역임했으며, 1949년 3월 민국당에 입당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을 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며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장충동 집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7월 29일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훈으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97년 출생 100주년을 맞이해 임진각에서 영혼장례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