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1월 26일 경상북도 대구 출생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대를 졸업했다. 김구·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으며, 광복군이 귀국한 후에는 자신의 집 등 재산을 처분해 대전 인근에서 광복군의 생계를 지원했다.
해방 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이후 국방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군에 투신, 국군의 전신인 호국군(護國軍) 106연대 부연대장으로 취임해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달성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회의원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1년 1월 26일 대구 남산파출소 인근 주택가에서 미군 2명이 여자들을 성희롱하려 하자 대구 남구 청년단 단장 김용득과 함께 미군들을 저지하려다 미군이 쏜 총에 맞아 왼쪽 옆구리 관통상을 당했다. 이후 대구 중앙병원으로 이송되어 대수술을 받았으나, 2월 2일 사망했다.
장례는 대구가톨릭교회에서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당시 전 국회의장 신익희, 경북 도지사 조재천, 대구시장 허억, 경북경찰국장 조준영 등이 참석, 조사를 낭독했다.
아들 권혁주는 1963년 부친 권오훈의 사망과 관련해 케네디 당시 미 대통령, 미 국무부 장관, 세계인권옹호협회, 미 8군 사령관, 박정희 대통령 등에게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미 국무부는 6개월 후 “10년 시효가 지나서 기록을 알 수 없어 기각한다”는 답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