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2월 ‘수입자유화기본방침’이 확정되고, 1980년대 들어 수입개방 농정으로 350여 종의 농축산물이 국내에 수입되었다. 그 중 1980∼1984년 육우 17만여 두, 젖소 3만 5,000 두, 쇠고기 2억 7,000여 만 근이 수입되었다. 소의 과다도입으로 소 값이폭락하자 120여 만 호의 소 사육 농가들이 큰 피해를 보았고, 농민들은 소 값 피해보상 및 농축산물 수입개방 저지투쟁을 조직했다.
농수산물 수입개방저지투쟁은 1985년 7월 1일 경상남도 고성 농민들의 시위를 필두로 ‘소몰이투쟁’이라 불린 농민의 생존권 투쟁으로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경남 고성 농민들은 “재벌은 돈 밭에, 농민은 똥 밭에”, “양키 소 몰아내고 한국 소 살아보자” 등의 구호를 플래카드와 소의 잔등에 부착하고 ‘경운기·소몰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 투쟁은 최초의 ‘소몰이투쟁’으로 국도를 차단하는 등 적극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였다.
이후 ‘소몰이투쟁’은 7∼8월 사이 안성(경기), 원주·춘천·홍천(강원), 안동·의성(경북), 고성·진양(경남), 괴산·음성·진천·청주(충북) 등 20여 개 시·군에서 총 2만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했다.
투쟁과정에서 농민들은 “소 값 피해 보상하라”, “외국 농축산물 수입 중단하라”, “농가부채 탕감하라”, “미국은 농산물 수입을 강요 말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농민들은 경운기에 방송시설을 설치하고, 소의 잔등에 각종 구호를 붙여 가두선전을 벌였으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해 수십 킬로미터를 시위행진하면서 주위 농민들이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다. 그리고 국도차단·도로점거·읍내장터 장악, 군 소재 집결지에서 시위·대회·농성 주도 등 강력한 투쟁 양상을 띠었는데, 이를 ‘경운기·소몰이 가두시위’라 불렀다.
투쟁 성격도 초기에는 소 값 피해보상과 농축산물 수입중지를 내건 생존권 확보의 성격을 띠었으나, 투쟁이 고조되면서 군사독재 반대라는 정치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7∼8월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9월 23일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한 전국 농민대회와, 9월 25일 가톨릭농민회·기독교농민회·가톨릭여성농민회가 공동주최한 ‘소 값 피해보상운동 진상보고대회’를 통해 전국 단위로 수렴되면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