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제70차 IPU총회, 1985년 IMF 및 IBRD 총회, 1986년 아시아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서울 전역의 빈민층 밀집지역인 산동네 판자촌에 대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일련의 대규모 국제행사를 앞두고 노점상 단속을 시작했으며, 1983년 10월 2일부터 13일까지 열린 국제의원연맹(IPU)총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서울역 양동지역과 남대문시장 노점상지역에서 대대적인 단속과 함께 노점행위를 금지했다.
이에 1986년 아시아게임이 끝나자 ‘노점상복지협의회’가 12월 29일 구성되었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노점상복지협의회’가 ‘도시노점상연합회’로 확대·개편되었다. 1989년 본격적인 노점상 단속이 시작되자 노점상단체들은 단속중단과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였고, ‘도시노점상연합회’는 1990년 2월 ‘전노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0년대 본격적인 빈민운동의 시작은 목동철거반대투쟁이다. 서울시가 1983년 4월 12일 목동과 신정동 안양천변 일대에 신시가지 조성계획을 발표했을 때 수용가격에 반발한 무허가주택 가옥주와 세입자들이 임대주택을 요구하며 100여 차례의 시위를 벌이며 투쟁을 지속했다. 이들의 활동은 허병섭, 오용식 목사가 소속된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와 1970년대부터 빈민 활동을 해왔던 제정구, 김여운, 박재천이 결합해 지원함으로써 이루어졌다.이러한 집단 경험은 이후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결성에 토대가 되었다.
이어 재개발구역이던 사당3동 산24번지와 상계5동 173번지에서 합동재개발사업에 대한 반대투쟁이 이어졌으며, 재개발 사업이 서울 전역에서 진행되자 철거반대 운동도 오금동, 신당동, 돈암동, 창신동 등으로 확장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면서 ‘서철협’이 조직되었으며, 대부분 철거지역에 종교계, 학생운동권, 민주화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지원에 나섰다. ‘서철협’ 결성 이후 철거반대투쟁은 1988년까지 도화동, 홍은동, 신정동, 전농동 등과 서초동의 꽃마을, 법원단지 등으로 늘어났다.
철거민의 고통과 요구에 대해 서울시는 1987년 10월 이주비 외에 방 한 칸 입주권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실질적 대책이 되지 못했다. ‘서철협’의 후신으로 1994년 결성된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은 노점상단체 등과 연대해 1989년 11월 11일 ‘전국빈민연합’(전빈련)을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