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추방운동 ()

목차
사회구조
개념
공해추방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 추방운동.
내용 요약

공해추방운동은 공해추방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이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공해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공해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공해문제 해결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88년 결성된 공해추방운동연합은 환경운동을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시켰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93년 전국의 8개 민간 환경단체와 통합해 환경운동연합을 창립했다.

목차
정의
공해추방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사회운동. 추방운동.
내용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공해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사양산업인 공해공장이 분별없이 도입되어 공해문제가 유발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근지역 주민의 생활과 건강이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더욱이 원자력 발전소는 방사능 오염 등 갖가지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지목되었으나 에너지 수입의 감소, 안정적 에너지 확보라는 명목으로 여러 곳에서 건설, 가동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가중되었다.

또한 공장과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유독가스로 인한 대기오염 증가, 산업폐기물과 오폐수, 농축산 폐수, 생활하수로 인한 수질오염 및 토양오염 증가,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등으로 환경과 생태계는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한번 파괴된 환경과 생태계는 그 복원이 거의 불가능하거나 장구한 세월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환경과 생태계의 보전·보호 대책은 무엇보다 절실한 것이었다. 정부는 1963년 11월 5일 「공해방지법」을 제정하고 1964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하지만 이 「공해방지법」은 “공장이나 사업장 또는 기계·기구의 조업으로 인해 야기되는 대기오염·하천오염·소음 또는 진동 등으로 인한 보건위생상의 위해를 방지”하는 목적을 가진 소극적인 입법이라 할 수 있었다.

정부는 1978년 「자연보호헌장」을 선포하고 국가 정책 차원에서 환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것도 환경운동에서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 중 ‘자연보호’라는 하나의 측면에 집중되었고, 환경오염을 양산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간과하고 있었던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공해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해방지의 중요성은 부차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90년 8월 1일에는 「대기환경보전법」이, 1991년 12월에는 「자연환경보전법」이 제정되었다. 1992년 9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자연환경보전법」은 “자연환경을 인위적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고, 다양한 자연생태계를 보전하며 보호할 가치가 있는 생물종의 멸종을 방지”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환경문제, 즉 공해가 날로 심각해져 환경이 파괴되고, 생태계가 교란되어 국민생활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일부 적극적인 지역주민이나 지식인 그룹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외면하며 ‘고도성장’이라는 구호에 갇혀 산업화시대를 달려왔다.

환경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낮은 인식으로 인해 공해추방을 비롯한 환경운동도 뒤늦게 전개되었다. 환경오염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자연발생적 운동은 1960년대부터 있었지만 환경문제를 구조적으로 인식해 해결 방안을 논의하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공해문제 해결을 위한 환경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공해추방운동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전문적인 환경운동단체로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 반공해운동협의회가 각각 1982년과 1984년에 결성되어 운동을 추동했다.

반공해운동협의회는 한국공해문제연구소에서 분화된 조직으로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이 협의회는 1987년 공해추방청년협의회로 개칭하고 회원을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등 대중조직으로 전환했다. 한편 한국공해문제연구소에서 분화되어 조직된 또 하나의 단체로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가 있었다. 이러한 공해추방청년협의회와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라는 두 개의 대중조직은 1988년 9월 통합해 공해추방운동연합을 결성했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이 결성됨으로써 환경운동은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은 반핵운동과 반공해운동을 2대 목표로 설정해 핵폐기물 불법매립, 핵발전소 건설, 골재 채취, 산업폐기물 불법 처리 등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공해를 추방하자는 여론을 환기시키고,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 광주환경공해연구회(1992년 광주환경운동시민연합으로 개칭) 등 관련 단체가 결성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회원 2,400여 명을 거느리는 국내 최대의 민간 환경단체로성장했다. 이렇게 성장한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93년 4월 2일 서울공해추방운동연합,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광주환경운동시민연합,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 마산·창원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등 전국의 8개 민간 환경단체와 통합해 환경운동연합을 창립했다.

참고문헌

『개발주의를 비판한다』(홍성태, 당대, 2007)
『한국 아시아 시민사회를 말한다』(조효제, 아르케, 2005)
「공해추방운동에서 새로운 사회모델의 제시까지」(최예용, 『사회평론 길』96-7, 1996)
「한국 환경 운동의 성장과 가치 지향」(최경애, 『사회와 역사』38, 1992)
국가법령정보센터(www.law.go.kr)
집필자
임송자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