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겪으며 인류는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하고 파괴적인 기술과 무기를 발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독일 나치가 우라늄을 이용한 대량 파괴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의 권고[맨해튼 계획]에 따라 미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였고, 이때 발명한 원자폭탄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핵 개발은 계속 이어졌다.
냉전 동안 미국과 구소련은 치열하게 군사용 원자력 개발 경쟁을 벌였고, 세계는 오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경험으로 핵이 가진 무서움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던 터라 긴장감은 고조에 달해 있었다.
인류 절멸의 위기의식, 여러 핵실험 사고와 핵에 대한 공포, 그리고 환경파괴에 대한 반동으로 세계 곳곳에서 반핵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50년 '스톡홀름 호소'는 서구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중적 · 조직적 반핵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많은 과학자가 반핵에 동참하는 등 '스톡홀름 호소'는 각계각층에서 반향을 일으켰고, ‘리지웨이 반대운동’(1952), ‘부다페스트 호소’(1953), ‘빈 호소’(1954), ‘헬싱키 호소’(1955), ‘올더마스톤 행진’(1959, 1961) 등 여러 반핵 활동이 연이어 전개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반핵운동(1950~1960년대)은 대부분이 지역적인 움직임에 그치는 등 크게 확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비키니섬(1954년), 쓰리 마일 섬(1979년), 체르노빌 사고(1987년) 등 핵실험과 원전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핵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핵무기와 무력을 증강하는 것이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핵전쟁을 아예 준비하지 않는 것이 핵전쟁을 막는 방법이라는 주장이 확산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반핵운동은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부터의 반핵운동은 환경에 대한 논의가 더해지면서 다면성을 띠게 되었으며,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소비자단체, 과학자단체, 종교단체 등 여러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반대운동을 하는 주체에 따라 반핵무기부터 반핵발전까지 운동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대되었다. 따라서 반핵운동은 핵무기 사용과 핵에너지를 이용한 전기와 동력을 생산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이다.
한국의 반핵운동 역시 이와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핵은 안보 차원의 생명 담보물로 인식되어 왔고, 반핵운동은 동원을 끌어내지 못한 채 일부의 반대 표명 정도에 그치었다. 그러다 1985년 영광핵발전소의 건설 문제가 보도되면서 반핵운동이 전개되었다.
한국의 반핵운동은 지역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에 의해 전개(1990년대)되었으며, 특히 방폐장 부지 선정 반대 운동(2000년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런 이유로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경주 방폐장 사업을 성공시키자 국내에서 반핵운동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반핵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2011년 이후 반핵운동은 지역주민과 일부 단체를 넘어 주부, 종교인, 정치인 등이 폭넓게 참여하는 다분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한국의 반핵운동은 ‘핵무기 금지조약’ 가입 동의 성명 진행 등으로 여전히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이어져 온 반핵운동은 여러 갈래의 이념적, 정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하나로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논의는 ‘평화’와 ‘환경보호’라는 키워드로 관통되며, 자발적 조직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핵운동은 여전히 많은 곳에서 지역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쟁이나 발전소 사고 등은 분명 당사국의 문제이지만 여기서 파생된 문제는 지구 전체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특정 국가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