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7월 27일 경상북도 영천 출생으로 이명(異名)은 이상백(李相伯),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대구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동산병원(東山病院)을 개업해 의료업에 종사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했다.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상해(上海)로 망명했으며, 1919년 4월 임시정부에서 국내외를 연결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설립한 교통부(交通部)의 교통위원(交通委員)으로 피선되었다. 교통부에서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 업무에 치중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의 수집 업무도 겸했다.
1919년 11월에는 국내 활동으로 체포 위기를 모면한 뒤 봉천(奉天)으로 건너가 국내 출입 안내역과 연락책으로 활동했으며, 12월에는 노령(露領) 니콜리스크(Nikolisk)시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1921년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 Dal’nerechensk)시를 탈출해 약 6개월간 배영학교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며 교육에 전념했다.
해방 후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천을에 출마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무투표 당선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