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1월 28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 출생으로, 전주에서 사립 호영학교(湖英學校) 중등과를 졸업하고 농업, 상업, 광업 등에 종사했다. 일제강점기 여수에서 큰 광산을 운영하며 비밀리에 상해임시정부와 연계하고, 국내에서는 송진우, 김성수 등을 도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아버지 이시형은 전주지방 유학자였으며, 맏형 이석규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 제적당한 후 동생 이석주와 더불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창씨개명을 거절하며 일제에 항거했다. 이석규는 해방 후 한국전쟁 때 퇴각하는 남로당에 의해 살해되었다. 제3대 국회부터 제12대 국회까지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승(李哲承)이 이석규의 아들이자 이석주의 조카이다.
이석주는 1945년 해방 이후 한국민주당 중앙상임위원, 재정부 차장을 역임하다가 1946년 한민당을 탈당해 반탁투쟁위 중앙위원, 대한노동총연맹 중앙상위재정부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북완주을 선거구에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제헌국회 산업위원회 광공분과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인사쇄신(내무장관 사직권고)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1952년 민주국민당 정책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이시영 · 김성수 · 장면 등 81명의 인사가 부산 국제구락부에 모여 정부 측의 「대통령직선제개헌안」에 반대해 반독재 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도모한 이른바 ‘국제구락부사건’으로 구속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정계 은퇴 후 1998년 10월 31일 서울 서초구 반포본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