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4월 28일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창리(현재 여주시 창동) 출생으로, 경성제일고보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검찰청 춘천지원, 서울 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여주지원장에 임명되었다.
여주지원장을 끝으로 정계에 투신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1954년 제3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연이어 당선되었다. 제2대와 제3대 국회의원은 무소속으로 지냈으나,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집권당인 자유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았다.
1952년 1월부터 12월까지 제2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 부산 정치파동(政治波動) 등을 겪었으며, 1955년 10월 제14차 UN총회에 옵저버(observer) 으로 참여했다.
제4대 국회에서 1958년 9월부터 1959년 8월까지 법제사법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1958년 12월 여당(자유당)이 발의한 「신국가보안법안」을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무수정 통과 시키는 데 동조했다.
1959년 부산에서 일어난 범칙물자처분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며, 1960년 6월 자유당 징계위에서 숙청대상자로 지명되어 제명처분을 받았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이 해체되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정치생활을 마감했고, 이후 변호사 업에 종사했다.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1985년 2월 14일 워싱턴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