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저대리 ()

조선시대사
사건
1721년(경종 1)에 노론 일파가 연잉군을 세제로 추대하고, 대리청정권을 주고자 주동한 일련의 정치적 사건.
정의
1721년(경종 1)에 노론 일파가 연잉군을 세제로 추대하고, 대리청정권을 주고자 주동한 일련의 정치적 사건.
개설

‘건저(建儲)’는 왕위계승자를 세우는 일이며, ‘대리’는 ‘대리청정(代理聽政)’으로 왕권을 대행하여 섭정하는 일이다. 역사 용어로서의 ‘건저 대리’는 1721년(경종 1) 8월부터 10월까지 노론(老論) 일파가 국왕의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위계승자인 세제(世弟)로 추대하고, 왕권을 대행하는 섭정권을 주고자 국왕을 압박한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노론의 연잉군(영조) 세제 책봉은 성공하였으나, 대리청정은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실패하였고, 소론의 역공을 받아 신임옥사(辛壬獄事)가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1701년(숙종 27)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사사(賜死)되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의 처지는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숙종은 경종 외에 연잉군과 연령군(延齡君)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노론은 경종 즉위 후의 후환을 염려하여 세자의 교체를 꾀하였고 소론은 명분을 고수하여 세자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1717년(숙종 43) 숙종은 노론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을 독대하여 세자 교체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이이명은 이를 만류하였다고 한다. 1720년(경종 즉위)에 숙종이 죽고 경종이 정상적으로 즉위하자, 노론은 정치적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소론은 희빈 장씨의 추숭(追崇) 문제를 제기하였고, 노론은 숙종의 희빈에 대한 처분을 공식화하고자 하였다.

경과

노론은 연잉군을 왕위계승자로 추대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준비 끝에 1721년(경종 1) 8월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熽)가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건의하였다. 경종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인가를 받아 즉시 건의를 수용하였다. 갑자기 세제 책봉이 승인되자, 소론(少論)은 반발하였지만, 이미 결정된 일을 번복시킬 수는 없었다.

2개월 후인 10월에 노론은 다시 사헌부 집의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를 통해, 경종이 병환이 많으므로 한가하게 요양할 수 있도록 세제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건의하였다. 경종은 당일로 청정을 허락하였으나, 소론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이 간곡히 말려 청정 명을 환수시켰다. 며칠 후 경종은 환수했던 대리청정 명을 다시 시행하도록 하교하였다. 이번에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의 노론들도 환수를 간쟁하였고, 당사자인 세제도 청정 명을 환수해주도록 상소하였다.

경종이 오래 동안 허락하지 않자, 김창집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환수를 위한 정청(庭請: 일종의 시위)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청 3일 만에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은 정청을 중지하고,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왕의 대리청정 명을 받들어 시행토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때 소론 우의정 조태구(趙泰耈)가 급히 입궐하여 청정을 만류하였다. 이에 노론 대신들은 또 말을 바꾸어 청정을 환수하자고 요청하였다. 결국 경종이 환수를 허락하여 대리청정은 무산되었다. 하루 사이에 청정 시행과 환수의 요청을 번복한 노론 대신들의 태도는 소론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결과

두 달 후인 12월 6일에 소론의 급진파였던 김일경(金一鏡)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김창집 등 4대신을 불충으로 탄핵 논죄하였다. 경종은 즉시 이를 수용하여 노론 대신과 중신들을 조정에서 축출하여 유배시키고 소론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것이 신축환국(辛丑換局)이다. 다음 해 3월에는 연잉군의 농장 마름이었던 목호룡(睦虎龍)이 고변하여,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를 꽤했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8개월 동안 가혹한 옥사가 일어나 노론 4대신을 포함하여 60여 명의 노론 인사들이 살육되고 수십 명이 유배되었다.

의의와 평가

1721년(경종 1)에 노론이 주동하였던 건저와 대리는 신임옥사의 전주곡이었다. 이로 인해 영조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지만, 대리청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말을 바꾸는 등 무리수를 범하여 소론의 공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은 4대신을 포함하여 많은 인사가 살육되거나 유배되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
『당의통략(黨議通略)』
『단암만록(丹巖漫錄)』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이영춘, 집문당, 1998)
『조선후기 당쟁사연구』(이은순, 일조각, 1988)
「경종조 신축환국의 전개와 김일경」(정회선, 『전북사학』11·12, 1989)
「경종조 신임사화의 발생원인에 대한 재검토」(정회선, 『송준호교수정년기념논총』, 1987)
「18세기말 노론일당전제 정치체제의 성립과정: 신임사화와 천의소감의 논리를 중심으로」(이은순, 『역사학보』110, 1986)
「신임사화에 대하여」(오갑균, 『논문집』9, 청주교육대학, 1973)
집필자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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