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 (을 위한 , )

개신교
사건
198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에서 개최된 남북한 및 해외 기독교인들 간의 첫 역사적 대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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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8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에서 개최된 남북한 및 해외 기독교인들 간의 첫 역사적 대화 모임.
역사적 배경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한국교회에 다시 통일논의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81년 6월 서울에서 “죄의 고백과 새로운 책임”이란 주제로 제4차 한독교회협의회가 개최되었는데, 한국교회는 같은 분단국인 독일교회와 협의회를 구성해 함께 통일에 대한 대화 모임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제4차 모임에서한국 기독교인들은 통일문제를 다루기 위한 위원회나 기구를 설치할 것을 협의회에 건의하였다.

198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 하델스톨프 쉬바이쳐 하우스에서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기독자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제1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 대화모임에는 전금철, 허정숙, 안병수, 고기준 등 북한에서 30명이 참석하였고, 해외 기독인 대표로는 이영빈 목사와 이화선 목사 등이 참석하였다. 『로동신문』은 이 회의를 “민족의 화해와 단결, 조국통일을 위한 첫 역사적인 회합”으로 보도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회의를 통해 자주적인 통일, 평화적인 통일, 민족의 대단결, 자치적 연합체 구성 등에 합의하였는데, 이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기치를 내건 7·4남북공동성명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모임은 한국 정부나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 모임을 종교행사를 가장한 친북인사들의 정치집회로 인식하여, 이를 기독교인들의 모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제2차 모임이 1982년 12월 3일부터 5일까지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렸다. 여기서는 해외교포 운동의 기본을 반독재민주화로부터 반미 자주화 문제로 전환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해외교포들을 민족 자주 통일의 기치 아래 결집시켰다. 그 후 10년 동안 헬싱키, 평양, 북경,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매년 정례적으로 개최하였다.

1·2차 회의에서는 북측의 주문에 따라 김일성 부자에 대한 비판에 신중했던 반면 미군 철수 및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 선교의 자유나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1984년 12월 17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3차 회의가 열렸으나 당시 국내 언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임에 참여한 해외 기독자들은 친북인사로 낙인찍혀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대화는 그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최근 남북의 역사학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북한에서는 “북과 해외동포 신자들의 통일의지를 시위한”모임으로 평가하였고, 남한에서는 “남북 기독교자들이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 모임이었다.”라고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교회사 속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위장 조직이 아닌 종교단체로, 그리고 그 지도자들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북 간 종교 교류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통일 논의를 독점하고 있는 당시 상황 하에 민간 차원에서 한반도의 통일 논의와 대화를 모색하였다는 점과 그 뒤 남북 기독자들이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의 역사』Ⅲ(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경계선』(이영빈, 신앙과지성사, 2005)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이만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집필자
이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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