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것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뒤인 1890년대부터 이곳저곳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M.E.P.)의 르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루도비코) 신부는 1895년에 재령공소(載寧公所)를 설정했으며, 이 공소는 1896년에 마렴(麻簾)성당(1897년에 매화동성당으로 개칭)이 설립되면서 여기에 속했다가 1899년 4월 22일 ‘재령성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르각(C. Le Gac, 郭元良 가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르각 신부는 부임 3개월 만에 초등학교(옛 慕聖學校의 전신)를 설립하고 각처에 공소를 설정했으며, 1901년 5월에는 봉산의 검수(劍水)성당(사리원성당의 전신)을 분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황해도 천주교회와 지방 관아 사이의 갈등에서 야기된 해서교안(海西敎案)으로 인해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05년 8월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멜리장(P. Mélizan, 梅履霜) 신부는 폐쇄된 절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조하였고, 기존의 초등학교를 모성학교로 인가 받아 운영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1918년에 자진 폐쇄하였다. 이어 1921년 5월에 부임한 3대 주임 신성우(申聖雨, 마르코) 신부는 유치원격인 동명학원(東明學院)과 야학 등을 운영하였으며, 청년회·소녀회 등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령성당은 1930년에 신성우 신부가 신천(信川)성당으로 전임되면서 잠시 이 성당의 공소가 되었고, 1933년 2월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성당으로 재설립되었다. 이후 방 신부는 성당을 증축하고 청년회의 활성화와 지역 선교에 노력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부임한 5대 주임 박정열(朴貞烈, 바오로) 신부는 신자가 운영하던 삼성의원을 인수하여 성심의원(聖心醫院)으로 개원한 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여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과 광복 시기에는 6대 주임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신부가 재령성당의 사목을 맡았고, 그 뒤를 이어 1946년 5월에는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북한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철수한 데 이어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양덕환 신부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신부는 신자들의 피신 권유를 물리치고 성당에 남았으며, 10월 5일 공산군에게 납치된 뒤 피살되었다. 이후 재령성당은 침묵의 성당이 되었는데, 같은 해 10월 중순에는 유엔군을 따라 온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가 약 1개월 동안 재령성당에 거처하며 사목한 적이 있었다.
역대 신부 중에서 양덕환 신부는 현재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