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복시성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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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서 신앙의 모범으로 살다가 죽은 인물을 교황의 공식 선언을 통해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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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천주교에서 신앙의 모범으로 살다가 죽은 인물을 교황의 공식 선언을 통해 공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운동.
개설

시복시성운동은 시복운동과 시성운동을 합친 용어이다. 신앙의 모범을 살다가 죽은 인물, 혹은 순교한 인물에게 ‘복자(福者)’라는 칭호를 수여하여 특정 교구나 지역, 국가, 혹은 수도단체 내에서 공경할 수 있도록 교황이 선언하는 행위를 시복이라고 한다. 시성이란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된 인물을 다시 성인(聖人)의 명부에 올리고 전 세계 천주교회가 공경할 수 있도록 교황이 공식 선언하는 행위이다. 시복시성운동이란 바로 그러한 인물들을 복자나 성인에 올려서 그들의 위대한 신앙심을 온 세상에 알리고 그 신앙심을 본받도록 하는 신앙운동을 말한다. 시복과 시성의 절차는 거의 비슷하지만 시복 행위는 무류적, 최종적 행위가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

역사적 배경

초대교회에서 순교자를 공경하는 행위들이 있었지만, 박해시기 이후에는 순교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나 학자들, 주교와 선교사들 등으로 그 공경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자 성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남용의 사례도 많아지자 6∼10세기에는 교구장인 주교가 시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성의 형식적 승인을 교황에게 의뢰하는 관습이 생겨나면서, 교황이 지닌 권위와 교황에 의한 시성이 영향력이 훨씬 크다는 이유로 교황의 주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교황이 주관한 최초의 시성식은 973년에 우달리코(Udalricus)의 시성식이었다.

한국 천주교에서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움직임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838년 말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자 제2대 조선교구장인 앵베르(L. Imbert) 주교가 순교자들의 행적을 포함한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고 난 이후부터는 관련자들이 체포되어 갈 때마다 후임자들이 계속 그 일을 이어받아서 추진하였다. 이런 조사와 기록의 과정을 거쳐 1906년 7월 26일 순교자 82명에 대한 「기해·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을 작성하고 관련 자료들을 첨부하여 교황청 예부성에 제출하였다. 그 결과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의 한국 천주교 순교자 79명이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도 1876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884년에 들어서야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01년 병인박해 순교자 29인에 대한 「병인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이 교황청 예부성성에 제출되었다. 그리고 이들 29인 가운데 24인에 대한 시복식이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경과

기해박해 1백 주년이 되는 1939년 당시 경성교구(현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순교자 현양운동을 펼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조선천주교순교자현양회를 조직하면서 이 회를 중심으로 다시 순교자현양운동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운동은 순교지 조사 보존, 순교자의 유물 수집을 통한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정도에 그쳤다.

시복시성운동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이후의 일이었다. 1971년 12월 13∼17일에 열린 주교회의에서 한국의 순교복자 103위의 시성 추진에 대한 안건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1975년 9월 13일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과 103위 복자의 시성을 위한 후원과 현양 사업을 전국적으로 추진하기로 하면서 본격적인 시복시성운동이 전개되었다. 1976년 4월 21∼23일 열린 주교회의 춘계 총회에서는 한국 주교들의 연명으로 103위 복자들의 시성 청원서를 작성하여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1983년 9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순교 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을 승인·선포하였으며 시성식은 한국에서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였다.

한편 시성운동과 함께 추진되었던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운동은 2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해체됨에 따라 1985년부터 각 교구별로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전주교구를 시작으로 청주, 대구, 수원, 제주, 부산 교구 등이 독자적으로 시복시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10월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시복시성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교구별로 진행되던 운동을 통합해서 추진하기로 하였다. 2001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003년 8월 1일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정일 주교(당시 마산교구장)는 「조선 시대의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소송청원서」를 교황청에 접수하였다. 2009년 6월 3일에는 ‘하느님의 종 124위와 증거자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청원서와 자료를 교황청의 시성성에 접수하였다. 2014년 2월 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124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을 승인하고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미사를 통해 124위에 대한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한국 천주교의 시복시성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124위에 대한 시성운동과 함께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이벽을 비롯한 초기 신자들, 남북 분단과 6·25전쟁을 통해 희생된 사제와 수도자를 비롯한 다른 신자들에 대한 시복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우리 순교자들을 현양하라」(『경향잡지』3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84)
「124위 순교자 시복 결정」(『가톨릭신문』2014.2.16.)
한국천주교주교회의(www.cb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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