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 지목구장 브레허(Theodor Breher, 1889∼1950) 신부의 요청으로 스위스 캄(Cham)의 성 십자가(Kloster HeiligKreuz) 수녀원으로부터 1931년 9월 14일 6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이들은 동년 11월 6일 연길에 도착하였고, 뒤이어 11월 9일 연길의 4층 수녀원에서 축성식을 거행하였는데, 처음에는 ‘연길 성 십자가 수녀원’으로 불렸다. 성 십자가 수녀원에서는 1939년까지 5차례에 걸쳐 20명의 수녀들을 연길에 파견하였으며, 한국인 지원자들도 꾸준히 증가하여 1944년까지 9차례에 걸쳐 21명의 한국인 수녀들이 서원을 함으로써 수녀원의 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과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수녀원은 폐쇄되었고, 외국인 수녀들이 추방되면서 결국 연길의 수녀원은 해산되었다. 당시 남아있던 한국인 수녀 가운데 14명이 1947∼48년 사이에 남한으로 월남하여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청주의 성심 보육원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며 남한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8년 안동과 행주 본당에 수녀들이 파견되었고, 1949년 7월에는 부산 중앙성당에도 4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같은 해에 모원의 도움을 얻어 경기도 소사에 과수원과 집 한 채를 매입하여 본원을 마련하였지만, 이듬해 일어난 6·25전쟁으로 수녀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부산에서 생활하던 수녀들은 부산 동구 초량동 31-3에 있는 2층 건물을 매입하여 1951년 11월 5일 성 분도자선병원(내과, 소아과, 이비인후과)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9월 12일 병원 한 쪽에 있는 수녀원에 수련원을 다시 개원하였다.
1953년 8월 24일 스위스에서 다시 수녀들이 파견되었는데, 연길에서 추방되었던 니콜라(M. Nikola Fassler) 수녀가 다시 수녀원장이 되었다. 1955년 3월 21일 남한에서 첫 종신 서원식이 거행되어 7명의 수녀들이 서원을 하였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의료 활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차차 부산과 경상도의 각 본당과 유치원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고, 김천의 성의 여중고에도 파견을 나가는 등 교육활동까지도 종사하게 된다.
1962년 3월 25일 광안동 산 110번지에 부지를 매입하여 새 건물을 지어 수련원을 이전하고, 1965년 6월 18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965년 6월 30일에는 부산교구에 편입되었던 수녀원이 단독 재단 법인으로 허가되었다. 1963년 10월 모원인 캄 수녀원이 교황청 직속 수도회로 승격되었고, 1972년 12월 1일 한국 수녀원은 대리구로 승격되었다. 1973년 4월 28일에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로 공식 명칭을 정했다. 1981년 6월 8일 교황청으로부터 자립 수녀회로 독립되었음을 인정하는 인가와 동시에 캄 수녀원과의 연합 결성도 승인되었다. 이후 수녀회의 활동은 부산교구 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구들로 확대되었고, 나환우나 장애아들을 비롯한 다른 사회복지에도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1990년부터는 해외에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1991년 연길에도 진출하여 과거 수녀원의 첫 터전에 수녀들을 다시 파견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회원 수가 증가함에 따라 1991년에는 부산, 대전, 서울 지역을 세 지구로 나누는 지구제도를 시작하였다.
2012년 현재 한국의 12개 교구 60개 본당, 해외 6개국 10개 본당 및 브라질 선교 등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이밖에 교구사회복지, 장애인복지, 노인복지, 도시빈민사도직, 이주민사도직, 한센병 환우 상담 등의 사회복지 활동을 비롯하여 교육 활동과 의료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