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승려 초엄복초의 시문을 박한영(朴漢英, 1870∼1948) 등이 모아서 간행한 시문집이다. 권1에는 문 15편이 실려 있고, 권 2에는 칠언율시 26편·오언율시 4편·칠언절구 8편·오언절구 1편 등이 실려 있다. 문은 상량문(上樑文)과 서문(序文)이 비교적 많고, 시는 경향 각처를 다니며 느낀 소감을 위주로 하고 있다.
박한영의 「초엄유고서(草广遺稿敍)」에 의하면, 복초는 무주(無住)를 지향하는 승려로서 시문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은 시문은 모두 산일되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문인들에게서 시문을 모아서 간행한다고 하고 있다.
필사본 2권 1책이다. 1925년경에 발행되었으나 발행지는 알 수 없다. 『한국불교전서』 제12책에 수록되어 있다.
초엄복초는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박씨 가문의 아들로 출생했다. 고성 옥천사(玉泉寺)에서 득도했고, 법호는 초엄(草广), 법명은 채오(采五)이며, 별칭으로 독오(獨悟)·채오(采吾, 彩吾) 등을 썼다. 1852년 이후에 박치복(朴致馥, 1824∼1894)의 문하에서 경사(經史)와 글을, 강위(姜瑋, 1820∼1884)로부터 시를 각각 본격적으로 익혀 당대에 벌써 명가(名家)라는 명성을 얻었고, 보연(普淵) 등의 제자를 두어 초엄 일가를 형성하였다. 1862년 무렵 신헌(申櫶, 1811∼1884)을 만나 방외(方外)의 친교를 가졌고, 이해 가을에 강위를 세 번째로 만나「고환거사의책발(古歡居士擬策跋)」을 지었다. 『원각경』등 불교 경전을 읽고 절대적 진리를 완전히 깨달았으나 속세와 선가에서 소용되지 않아 내내 고독하게 생활했으며, 말년에는 전국 산천을 주유하며 무아(無我)의 대자유를 즐기다가 1880년대 이후 멀고먼 변방의 고비사막에서 입적했다.
『초엄유고』에 실린 시는 총 39편이며, 문은 15편이다. 시가 매우 적은데, 이는 저자가 작품을 모아두지 않은 까닭과 함께 승려가 문장창작을 숭상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서문에 나와 있다. 그럼에도 그중에서 「과공민왕릉(過恭愍王陵)」·「만월대(滿月臺)」·「대흥사완월루(大興寺玩月樓)」는 『대동시선(大東詩選)』(1918년)에도 실려 있다.
상량문으로는 「금원산삼화선사신건상량문(金猿山三花禪寺新建上樑文)」·「옥천사대웅전상량문(玉泉寺大雄殿上樑文)」·「운흥사극락전상량문(雲興寺極樂殿上樑文)」이 있다. 문 가운데 가장 특색이 있는 것으로서는 「삼화전(三花傳)」이 있다. 「삼화전」은 저자의 자서전(自敍傳)이라 할 수 있는데, 삼화(三花)가 바로 저자를 가리킨다. 「삼화전」은 평범한 인간이 불교에 입문하여 득오하기까지의 내면의 변화를 묘사한 작품으로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가공이 아니라 실제로 저자가 만났던 인물임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현학관선생(玄鶴館先生)은 신헌이며, 현학관선생의 아들인 소금공(小琴公)은 신헌의 서자(庶子)인 신찬희(申贊熙)이다.
박한영은 「초엄유고서」에서 저자를 초의의순(草衣意恂)과 견줄 대문장가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작품은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초엄유고』는 저자의 자유롭고 특이한 생애와 마찬가지로 파격적인 작품이 많다. 특히 「삼화전」은 자서전으로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