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대송(布袋頌)』 1권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동문선(東文選)』 권64 「청평산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에 이자현의 저술로 언급되어 있다.
이자현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에 들어가 문수원에서 평생 선을 행하며 살았다. 그는 고려 중기에 선의 부흥에 크게 일조하였으며, 자연주의 사상을 표방하였다. 그의 저술은 남아있지 않지만 『선기어록(禪機語錄)』과 『심요(心要)』를 제외한 모든 저술서의 이름에 자연주의적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자현은 거사불교(居士佛敎)를 표방하면서 절 밖에 있는 다른 동네에 사사로이 거처하는 집을 지었는데, 그 암자·불당·정자 등이 모두 10여 개소나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당은 문성(聞性), 암자는 견성(見性)·선동식암(仙洞息庵) 등으로 지어 자연스럽게 어느 곳에서나 마음을 쉬고 정신을 수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포대화상 삶의 지향점이 이자현과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에 포대를 기리는 글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포대화상은 원래 정웅대사(定應大師)라고 하는 후량(後梁)의 고승을 가리킨다. 이 고승은 늘 작대기에 포대, 즉 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무엇이든 동냥한 것을 그 속에 담곤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 포대화상은 배가 나오고 대머리이며 때로는 호탕하게 웃고, 때로는 거칠면서도 선종에 명석하였던 인물로 미륵보살의 현신(現身)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포대화상의 삶을 통해 이자현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저술서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