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1권이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의천(義天, 1055∼1101)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권제1과 일본의 불교 관계 저술 목록인 『증보제종장소록(增補諸宗章疏錄)』에 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스스로를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불렀던 태현은 원효(元曉)·경흥(憬興)과 함께 신라의 3대 저술가로 손꼽힌다. 그의 저술은 약 52부 1백여 권이나 된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현유가(賢瑜伽)」조에 의하면 그를 ‘유가조(瑜伽祖)’라고 하여 해동(海東) 유가의 초조(初祖)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유식과 인명(因明)에 통달하여 국내의 후진을 일깨웠으며, 중국의 학사들까지도 안목(眼目)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미륵신앙 이외에 정토신앙에도 관심을 보여 9부의 정토관련 저술을 남겼다.
태현은 방대한 그의 저술 대부분을 특이하게 ‘고적기(古迹記)’라고 명명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고인(古人)들의 여러 주석에 순응하여 풀이할 뿐, 개인의 견해로써 함부로 풀이하지 않았음을 뜻하며, 여러 학설 가운데 엄정하게 장점만을 취하여 찬술했음을 의미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과 함께 정토종의 근본경전인 『관무량수경』의 주석서인 『관무량수경고적기』 역시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