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진실주집(續眞實珠集)』의 편저자인 휴정은 호가 청허이고, 묘향산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하였다. 금강산 백화암에 있었기 때문에 백화도인(白華道人)이라고도 하고,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직을 사임한 뒤에는 퇴은(退隱) 등으로도 불렸다.
휴정은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 머리를 깎고,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 불경을 배웠다고 한다. 1552년(명종 7)에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선교양종판사를 겸하고 선종의 본사였던 봉은사의 주지를 맡았다.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鄭汝立)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제자 사명 유정과 함께 관아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곧 무죄로 석방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한양을 함락하고 선조(宣祖)가 평양을 거쳐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을 가는 상황이 되자, 선조는 묘향산에 사신을 보내 휴정을 부르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할 방도를 물었다. 이에 휴정은 당시 72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약속하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의 벼슬을 받는다. 이어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도를 모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휴정의 공로를 크게 평가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을 내렸다.
휴정의 수많은 제자들은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이후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조선 후기 불교 교단의 계파는 선종의 법맥 전승과 더불어 법통과 계파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였는데, 청허의 문도에서 형성된 일명 청허계는 조선 후기 최대의 계파가 되었다. 그의 저술로는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설선의(說禪儀)』, 『회심곡(回心曲)』 등이 있다.
『속진실주집』은 쇠퇴했던 불교를 다시 일으킨 청허 휴정이 저술한 책이다. 1860년에 1책,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함풍 10년(1860) 경신 11월에 중간하여 묘향산 판전에 보관한다.”라는 간기가 있으며, 간기 앞에 수록된 쌍운(雙運)의 발문에는 이 책의 최초 판각이 ‘만력 갑진년(1604) 시월 하순(萬曆甲辰良月下澣)’에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상은 우리 등계대사께서 정밀하게 가려 뽑으신 글이다[右奏惟我登階大師翁爲人精選也]”라는 문장이 있으므로, 이 책은 휴정이 편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민영 소장본이 현재 유일한 휴정의 친필 판각본으로 알려져 있다.
『속진실주집』은 중국 송나라 무주거사(無住居士) 예묘행(倪妙行)이 여러 선사의 명(銘) · 가(歌) · 심요(心要) · 법어(法語) · 시(詩) · 문(文) 등을 모아 편집한 일종의 선어록(禪語錄)인 『진실주집(眞實珠集)』을 발췌하여 속편을 제작한다는 의미로 휴정이 붙인 서명이다.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에서 「고사답여사인(杲師答呂舍人)」과 「답왕교수서(答王敎授書)」 2칙을 발췌하였고, 『고봉화상선요(高峯和尙禪要)』에서 「고봉시중(高峯示衆)」 1칙을 발췌하였다. 그리고 『치문경훈(緇門警訓)』에서 「자경문(自警文)」과 「석난문(釋難文)」 2칙을 발췌하였으며, 『선림보훈(禪林寶訓)』에서 송나라 명교설숭(明敎契嵩) · 원통거눌(圓通居訥) · 대각회연(大覺懷璉) · 법원녹공(法遠錄公) · 불안청원(佛眼淸遠) · 변공(辨公) · 밀암함걸(密庵咸傑) · 초당선청(草堂善淸)의 법문(法門) 8칙을 발췌하여 책을 구성하였다.
『속진실주집』은 조선 중기 선풍(禪風)의 중심을 이루었던 휴정이 선가의 귀감이 되는 내용을 발췌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선 사상(禪思想)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휴정의 친필을 그대로 판각한 목판본이기에 서예사적 가치 또한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