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이며, 필사본이다. 『염불요문과해(念佛要門科解)』는 다양한 경론을 인용하며 어구 풀이에 치중하였다. 염불을 “본각(本覺)의 진심을 부지런히 지킨다.”라는 의미로 보는 등 『기신론(起信論)』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염불요문과해』는 지눌의 저술로 해석되는 『염불요문』을 송광사의 금명보정이 크게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나누고 『염불요문』의 핵심인 열 가지 염불로써 정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문헌이다. 보정은 이 책을 통해 보조 지눌의 권위를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조사의 종지를 조계산(曹溪山)에서 널리 펴시니, 경절문(徑切門)과 원돈지(圓頓旨)로는 선정을 익히고 지혜 또한 균등히 닦는 지도리를 삼으셨고, 정토문(淨土門)의 염불로는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을 삼으셨다.”라고 하면서 송광사 조계산의 조사이며 조선 후기 삼문의 종주로 지눌의 위치를 부여하였다.
조선 후기의 3문, 즉 경절문·원돈문·정토문은 각각 선·교·염불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통용되었는데, 이는 지눌의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성불문(圓頓成佛門)·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3문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보정은 3문을 닦는 수행의 유래를 지눌로 소급하고, “조계산에 선종·교종·염불종의 3종이 있어 창사 이래 모두 겸행하였다.”라고 설명한다.
보정의 행적을 전하는 「행록초(行錄草)」와 「금명선사비명(錦溟禪師碑銘)」에 따르면, 그는 1861년(철종 12)에 전라도 곡성 운룡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김씨이다. 보정은 법휘이고, 자는 다송(茶松)이며, 호는 금명이다. 15세가 되는 1875년에 송광사의 금련경원(金蓮敬圓)에게 출가하여 2년 후 경파(景坡)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사방을 유력하면서 당대의 스승을 찾아 교학을 배웠으며 송광사 출신 허주덕진(虛舟德眞, 1806∼1888)을 만나 의심을 깨쳤다.
30세가 되면서 스승 금련의 법을 계승하여 개당하였고, 이후 송광사는 물론 지리산 화엄사 등 인근 사찰에서 강설하였다. 1897년에 보조암(普照庵)에서 강설할 때 제자에게 전강(傳講)을 하였는데, 이것을 그의 ‘제1처전심’이라고 한다. 이후 해인사의 도총섭(都摠攝)을 네 번 맡으면서도 해인사·천은사 등에서 강설을 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조선 후기 13대 고승으로, 왕궁의 법회(法會)를 주관했던 보정은 1910년 임술국치 이후 한문과 불교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교육사업에 치중했다. 1920년에는 전국각지에서 자료를 모아 보조국사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386명의 고승을 정리하는 10년 불사 끝에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을 완성했다. 1917년 또 한 차례 전강(傳講)을 하여 ‘제2처 전심’을 맞고 1928년에 한 번 더 전강을 하여 ‘제3처 전심’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불조록찬송(佛祖錄贊頌)』, 『정토호백영(淨土護百詠)』, 『보살강생시천주호법록(菩薩降生時天主護法錄)』, 『질의록(質疑錄)』,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 『저역총보(著譯叢譜)』, 『다송시고(茶松詩稿)』, 『다송문고(茶松文稿)』 등 다수가 있다. 1942년에 ‘금명대종사탑(錦溟大宗師塔)’이 건립되었다.
보정은 『염불요문』을 지눌의 저술로 이해하고 과문과 해석을 붙였는데, 『염불요문』이 지눌의 저술이라는 사실이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물론 조선시대에 간행된 『염불인유법문(念佛因由法文)』이나 진허팔관(振虛八關)의 『삼문직지(三門直指)』에도 지눌의 저술이라는 기록이 없었다. 그러나 보정이 『염불요문』을 지눌의 저술이라고 하여 이후 『염불요문』을 지눌의 저술로 받아들여지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